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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Sep 10. 2024

순금 할머니

죽음은 예외 없이 예고 없이 오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아무리 죽음을 준비하여도 죽음은 당혹스럽다. 처음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금 할머니는 팔순을 삼주일 앞두고 돌아가셨다. 가족들이 어머니의 팔순에 잔치를 하자고 준비하고 식당도 예약하였는데, 팔순이 되기 직전, 할머니는 이 땅을 떠나셨다. 건강하셨기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주일 아침, 순금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에 가셨다. 주일에 교회에 가시는 것은 목사님 사모님이셨던 할머니가 평생 해 오신 일이었다. 아침 예배를  잘 드리고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점심을 드셨다. 주위 분들이 보니까 할머니가 평소보다 밥을 적게 드시는 것 같아 걱정하자, 할머니는 먹은 것이 체했는지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다른 이상은 없었다.      


점심을 드시고 조금 쉬다가 열린 여전도회 모임에서 할머니는 기도를 하셨다. 그날 할머니의 기도는 조금 길었다. 기도의 내용은 “그동안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 분들의 사랑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분들의 사랑을 갚아주시고 축복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여전도회 모임이 끝나자 할머니는 2시 예배까지 참석하셨다. 몸이 좀 안 좋으니 뒤편에 앉아 있겠다고 하셨다. 1시간여에 걸친 예배가 끝나고 보니 할머니가 거의 숨을 쉬지 않는 것이었다. 곧바로 응급 처치를 하면서 119를 불러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중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함께 예배드렸던 성도들이 병원까지 같이 갔다가 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보았다.     

 

정작 가족들은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속이 불편하고 힘이 없다는 전화에 큰딸은 교회에서 돌아오실 어머니를 위해 링거를 준비하여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되시는 목사님, 아들들도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어머니, 아내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들었다.

      

장례식은 경황없는 중에도 품위 있게 진행되었다. 장례식 동안 가족들의 슬픔은 가득했으나 오신 분마다 이런 죽음은 처음이라고, 얼마나 복된 죽음이냐고 부러워들 하였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마지막 기도까지 하시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무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감탄하였다. 할머니의 복된 죽음은 꼬리를 물고 전해졌다. 울던 가족들도 듣고 보니 할머니의 마지막이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장례식장은 즐거운 만남의 장이 되었고 축복의 나눔이 되었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소망의 장이 되었다.      


순금 할머니는 넉넉하고 후덕한 분이셨다. 시골 부농의 막내딸이었던 순금 할머니는 아버지가 정혼해 준 교회의 전도사와 결혼했다. 1953년 6.25 전쟁이 끝나가는 때였다. 젊은 전도사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가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다가 성경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되었다. 교회가 없는 농촌 선교에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교회 없는 농촌에 교회를 개척하는 열혈 전도사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빨치산들은 교회의 젊은 전도사인 청년을 선창가로 끌고 가서 죽을 만큼 때려서 버리고 갔다. 순금 할머니의 아버지가 되는 교회의 장로님이 죽어가는 전도사를 찾아서 자기 집에다 숨겨두고 치료하면서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나가던 해에 자기 막내딸을 전도사님에게 주어 가정을 꾸리게 하였다. 순금 할머니의 60년 결혼생활의 시작이었다      


순금 할머니는 천성이 후덕하고 조용하였다. 부지런하고 말이 없어 남편의 목회를 가는 데마다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하였다. 그 사이에 2남 3녀의 자녀들도 낳아 길렀다. 남편은 강직하고 불같은 성격이어서 편안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교회가 없는 곳만 찾아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가난을 피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한 때여서 사방 천치에 굶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할머니는 집에 오는 사람들은 거지든지 장사든지 빈 속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김치 하나에라도 꼭 밥을 먹여서 보냈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잔돈이라도 쥐어 주었다. 길에 쓰러져 있는 거지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는 남편을 탓하지 않고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내보냈다. 남편은 평생을 고무신에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고무신 목사님, 자전거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사이였다. 할아버지는 바깥출입을 할 때는 꼭 할머니에게 존댓말로 나가는 것을 알렸다.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녀들과 아이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였다. 한 번도 큰소리를 윽박지르거나 때리는 법이 없었다. 자녀들은 모두 할머니를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분, 베풀기를 좋아하고 넉넉하게 나누어 주던 분으로 기억하였다.       


할머니의 평생의 삶은 화려하거나 편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초라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항상 입에서는 감사가 흘러나왔고 주신 것에 자족하는 충만한 삶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시면서도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하시면서 삶을 마감할 수 있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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