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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Aug 27. 2024

병심 할머니

이별, 아름다운 임종

할머니는 후덕하셨다. 몸집도 보기 좋게 넉넉하셨고 얼굴도 둥글둥글 덕스러우셨다. 항상 웃는 얼굴이셨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꼭 덕담 한 마디씩을 건네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셨다.


고향이 완도였는데 해방 바로 전 해인 1944년에 중매로 결혼하셨다. 남편 되는 분은 이쪽 남도가 고향이었지만 전기 기술자가 되어 평안북도에 있는 전기회사에 근무하였다. 지금은 좀 낯설지만 일제 치하이기는 했어도 한반도 전체가 한 나라, 한 국토여서 남과 북의 교류가 전혀 이상하지 않던 때였다.


한반도가 한 나라였다는 새삼스런 자각과 남북 간의 왕래가 전혀 이상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90세가 가까운 친정 엄마가 고향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말씀을 노래처럼 하신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엄마는 점점 몇 안 남은 친구들과 빨리 만나야 한다는 조급함을 자주 토로하셨다.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서 엄마 친구분들을 오시라고 해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가게 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은 엄마 포함 다섯 분이나 되셨고 만나 보니 모두들 그 당시 그러니까 일제 치하에서 여학교를 다니셨던 인테리겐챠들이셨다.  남편과 함께 하루를 할애하여 근교를 여행시켜 드리고 식사를 대접하였다. 대접이라고 얼마나 극진하였을까마는 엄마와 친구분들은 마치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처럼 그때로 돌아가서 깔깔거리며 즐거워하셨다.


친구분들과의 대화를 옆에서 들으면서 내가 책에서만 배웠고 실감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실제로 감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 그때 과외받았잖아? 그 학교는 일본 얘들이 다니는 학교라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입학 과외를 받아야 했어.”  “그래, 난 그때 과외를 받지 못하고 조선 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 갔지.” “000는 개성에 있는 호수돈 여학교로 갔잖아? 그리고 선생님을 했지?” “그때 개성까지 가는 게 무척 힘들었다고 했어. 우리 고향에서 기차 타고 서울까지 가면 진이 빠지는데 서울에서 다시 개성까지 가야 했으니까.”  “우리 오빠 친구였던 000 오빠는 그때 사회주의 한다고 북으로 갔지? 참 똑똑하고 잘 생긴 오빠였는데... 그리고는 소식을 모르지.” "그때는 똑똑하면 대부분 사회주의를 했어. 그것을 독립운동으로 생각했으니까."그러면서 엄마들은 서로를 미야꼬, 요꼬... 등으로 부르면서 일본말로 대화를 하시는 거였다. 아, 우리가 책에서만 던 시대가 실제로 존재했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늙어 할머니일 뿐인 그분들이 사실은 우리나라의 근현대를 짊어지고 오신 대단한 분들이라는 자각이 왔다.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한 분 한 분에게 존경심과 경외감이 솟아올랐고  이런 산 역사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병심 할머니의 결혼 상대자였던 청년은 정혼한 처자가 있으니 선을 보라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미 집안에서 정혼을 한 것이라 선을 본 것은 의례적 순서에 불과했다. 청년은 이틀이 걸리는 길을 내려와서 선을 보고 선을 본 지 세 달 만에 결혼을 하고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신부와 함께 다시 회사가 있는 평안북도로 올라갔다.


병심 할머니는 결혼하자마자 한 번도 떠나지 않은 남쪽 고향을 떠나 머나먼 북쪽  평안북도로 올라가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처녀 시절에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할머니는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신앙을 갖고 선교사들을 도와 선교 활동에 전념하다가 결국 목사님이 되신 시아버지와 시댁의 가풍을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평안북도로 가서도 할머니는 교회부터 찾아가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결혼 이듬 해인 1945년에 갑작스럽게 해방이 찾아왔다. 나라는 혼돈에 싸였고 남과 북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얼마 안 있어 고급 전기 기술을 가지고 있던 남편은 고향 사람의 소개로 광주에 있는 방직공장에 취직이 되었다. 할머니도 남편을 따라 광주로 올라와 살림을 차렸다. 목사님의 아들로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남편은 회사 안에 교회가 세워지자 그 교회의 창립 멤버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였고 할머니도 역시 남편을 따라 교회 생활에 열심을 다하였다. 그 사이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서 공부시키고 키워서 모두 결혼을 시켰다.


남편은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각자 결혼하여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전도사 생활을 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할머니도 남편을 따라 시골로 가서 남편을 열심히 보좌하였다. 10여 년이 넘게 시골 교회를 세우던 남편은 79세에 먼저 하늘나라로 다.


성품이 활발하고 부지런한 할머니는 시골 교회생활을 끝내고 광주로 돌아와 원래 다니던 교회에서 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90세가 넘어서도 꼬박꼬박 교회에 출석하셨던 할머니는 코로나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고 몸이 불편하여 교회에 출석할 수 없게 되자 집에서 매일 예배와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삼으셨다.


할머니의 기도는 세계 평화부터 시작하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선교지에 파견되어 계시는 선교사님들,  북한과 우리나라와 위정자들, 교회와 주변 동네, 그리고 자녀들과 집안을 위한 기도로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을 기도한다고 하셨다. 기도가 힘들고 피곤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기도할 제목이 점점 많아져서 자꾸 기도시간이 늘어나 기도가 깊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기도하기 위해서 할머니는 매일 신문과 뉴스를 꼼꼼하게 챙겨 보면서 기도의 방향을 잡으신다고 하셨다.


날씨가 더워지는 7월이었다. 오후에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이 연로하신 할머니를 방문하였다.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하였더니 할머니께서 힘이 없어서 앉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누워서 예배드리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거실 소파에 할머니를 눕게 하고 그 앞에 목사님과 성도들이 둘러앉아 예배하고 기도하였다. 할머니는 기운이 없지만 정신은 분명하여 함께 예배하고 교회와 교우분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묻는 말에 대답도 또렷또렷하게 하셨다. 오후 4시쯤 되어 손님들이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방에 가서 좀 겠다고 들어가서 침대에 누우셨다.


저녁 7시경에 퇴근한 아들이 평소처럼 방문을 열고 퇴근 인사를 하면서 식사하시자고 하는데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아들이 누워계신 어머니를 살펴보자 이미 돌아가신 것이었다. 목사님과의 예배를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방에 들어가서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었다.


병심 할머니의 생전의 자랑은 4남 2녀의 자녀 손들 가운데 목사가 3명, 전도사가 2명 나온 것이었다. 시집와서 믿기 시작한 신앙생활을 80년 가깝게 면서 살 수 있었던 것도 늘 감사의 제목이었다.


97세를 건강하게 장수하셨고 마지막을 예배로 마무리하고 혼자 조용히 방에서 운명하신 할머니는 분명 하늘나라에 가신 것이라고 장례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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