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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Aug 06. 2024

덕순 할머니

덕순할머니는 90세에 멋지게 세상을 떠나셨다. 조문을 오는 사람들도 기쁜 마음, 기쁜 얼굴이었고, 조문을 받는 유족들의 얼굴도 환하고 밝았다. 얼마나 기뻐했느냐 하면 입관예배를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이렇게 멋지게 천국 가는 모습을 보여주신 권사님께 박수를 쳐드리자고 해서 모인 조객들이 모두 박수를 칠 정도였다.

덕순할머니는 후덕하고 덕스러운 부잣집 마님의 모습이셨다. 고생이라고는 안 하신 것 같이 항상 넉넉한 웃음을 지으셨고 즐겨 입으시던 한복의 매무새도 단정하여 흐트러지지 않았다. 야무진 손끝으로 바느질을 잘하셔서 한복집에서 버리는 자투리 천들을 모아다가 조각 상보나 조각 보자기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곤 하셨는데 얼마나 정교하고 예뻤는지 예술품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다. 그 정성스러운 상보와 보자기는 수백 명의 이웃들에게 전해졌을 만큼 덕순할머니의 상징물이 되었다.​


기도를 많이 하셨던 덕순할머니는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도 있었다. 아픈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기도 부탁을 하였는데 기도를 받은 사람들이 병이 나아서 소문을 냈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자기의 공으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하면서 입단속을 시키셨다.​

고생을 전혀 모를 것 같은 덕순할머니의 일생은 의외로 신산하였다. 딸만 7자매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서 19살에 17살 되는 신랑과 결혼하였다. 아들을 낳고 밑으로 딸도 하나 낳아 다복하고 유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렇게 계속될 것 같았던 단란한 가정은 아들이 7살 되고 덕순할머니가 25살 되던 해에 남편의 월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겨우 7년 결혼생활에 두 남매를 남기고 남편은 자기의 신념을 좇아 북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일본 식민지 치하와 해방 무렵 우리나라의 젊은이, 특히 먹물이 들어간 지식인들은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 덕순할머니의 남편 또한 젊은 나이에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처자식을 버리고 북으로 가버린 것이다.


그 후 덕순 할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채 모진 세월을 살아야 했다. 다행히 살던 인천은 인형 만들기, 봉투 만들기 등 부업거리가 많았다. 덕순 할머니는 별별 부업을 전전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아이들을 길러내었다. ​

아들이 반듯하게 성장하여 광주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취직이 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광주는 인천과 달리 일거리가 많지 않았다. 권사님은 일거리도 없고 객지 생활이 무료하기도 하여 교회생활에 몰두하셨다. 예배 때마다 꼬박꼬박 참석하시고 다리가 불편해도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다. 성경 필사도 2번이나 하시고 교회 봉사에도 열심이셨다. 천성이 부지런하여 집 근처의 공터를 놀리지 않고 채소를 심어 주변에 나눠 줄 만큼 이웃을 돌보셨고 건강하셨다. ​

90세 되던 해의 초복날이었다. 같이 사는 며느리가 토종닭을 한 마리 사서 닭죽을 끓였다. 간도 맞고 맛있구나 하면서 한 그릇을 거뜬히 다 드셨다. 식사 후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덕순할머니의 동생 딸이 전화를 했다. 남동생이 다니던 회사의 대표이사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알린 것이다. 그 집안은 덕순할머니의 여동생 되는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서 큰 이모 되는 덕순할머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덕순할머니도 이종 조카와 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냐 하는 내용의 전화를 꽤 길게 하셨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기를 넘겨주면서 내가 몸이 조금 이상하구나 하셨다. 살펴보니 말씀이 흐려지고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아들 내외는 바로 119에 전화하였다. 구급 대원이 전화를 끊지 말고 지시하는 대로 인공호흡을 시키라고 하면서 출동하겠다고 하였다. 정말로 빨리 온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고 하니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태라고 하면서 대학병원으로 이송하였다. 병원에 도착하여 CT 촬영을 하고 맥을 짚어 보던 의사들은 이미 늦은 것 같은데 그래도 수술을 하겠느냐고 가족들의 의사를 물었다. 수술받지 않기로 하고 병원에 온 지 2시간여 만에 덕순할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집에서 내가 이상하구나라는 마지막 말씀을 하신 지 세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그래서 입관예배 중에 목사님께서 하늘나라 가시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신 권사님께 감사의 박수를 쳐드리자고 하셨던 것이다.​

고달픈 인생길을 헤쳐 나오면서도 성실하고 베푸는 삶을 살다가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인생은 남은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고 소망을 주는지 모른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고 아름다운 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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