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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Jul 30. 2024

현희 남편

아카시아가 만발한 5월이었다. 햇빛이 눈부신 어린이날이었다. 35살 꽃다운 미망인과 6살, 4살의 철부지 아이들이 떠나가는 남편과 아버지를 영결하고 있었다. 모두들 기가 막혀 아무 위로도 못하고 있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미망인은 초연한 표정으로 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편 나이 40살, 세상을 떠나기에는 젊은 나이였다. 세상은 곳곳에 예측 못할 의외가 숨겨져 있는 지뢰밭이요 아이러니가 잠복되어 있는 살얼음판

이었다. 남편은 남의 병을 고치는 외과 의사였다. 수술 잘하는 명의라는 평도 받고 있었다. 명의가 자기 병은 말기에 이르도록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지뢰였고 아이러니였다.


몸이 이상하다 생각한 남편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위암 말기, 3개월 정도 남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배를 열어보니 이미 손을 쓸 수도 없어 그냥 봉합하였다. 긴 의대 공부와 수련의 생활을 마치고 꿈에 부풀어 개업한 지 7년, 이제야 주변에 이름이 나고 있었는데...


둘은 병원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자기가 수련받았던 병원에 환자로 입원하였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기적은 없었다. 병은 대장까지 번졌다. 남편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날마다 여자에게 항문 쪽을 만져 보라고 했다. 분비물이 나오는가 확인하라는 거였다. 그러나 막힌 장기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항문 쪽은 메말라 있을 뿐이었다.


병원 맞은편 길 건너에는 여자가 다닌 여학교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이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밝고 개방적이었다. 조그마한 규모라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도 가깝고 가족적이었다. 건물이나 교육방식도 서양식이었고 이국적이었다. 아버지가 그 학교의 선생님이셔서 여자는 학교에서 유명했다. 모르는 선생님이 없었고 학생들도 다 알았다. 공부도 잘했고 성격도 소탈하여 누구 하고도 어울렸다. 약대에 진학해서는 캠퍼스가 좁다고 누비며 다녔다. 졸업 후에는 약사가 되어 모교 앞에 있는 병원에 근무하면서 남편을 만난 것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빈소를 찾았다. 너무 이른 사별에 친구들도 황망하였고 정신이 없었다. 아들을 먼저 보내는 시어머니는 소복을 입은 며느리를 보고 저것이 너무 젊어서 어떡하냐고 울다가 까무러쳤다. 저녁이 되자 여학교의 은사님들이 조문을 오셨다. 교감선생님이신 아버지와의 친분과 여자를 아끼던 선생님들이셨다. 선생님들은 말없이 술잔을 들고 넘어가지 않는 저녁밥을 드셨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은사님들이 소복 입은 제자를 조문하는 이상한 일이 현실이 되어 벌어지고 있었다.


빈소에서 나와 건너편을 보면 하얀 교복을 입었던 여자가 생각났다. 운동복 바지 위에 교복 치마를 겹쳐 입고 펄럭거리며 뛰어다니던 여자가 보였다. 눈부시게 피어나던 아카시아와 쭉 뻗어 올라가던 플라타너스가 여전히 위용을 자랑했다. 생각하면 걱정도 아니었던 것들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치기 어린 때였다. 저녁 늦게 공부한다고 남아 놀기에 바빴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까르르  하늘로 올라갔다. 모든 것이 눈부셨던 시절이었다.

빈소로 들어갔다. 하얀 상복을  입은 여자는 웃으면서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있었다. 가 사다 주었는지, 어쩌면 떠날 아빠가  마지막 선물로 미리 준비한 것인지 모를 어린이날 선물이 아이들의  가슴에 한 아름씩 안겨 있었다.


남편은 다행히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였다.  매일 부인과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느라 바빴다. 작은 추억이라도 만들어 주려고 날마다 이벤트를 계획했다. 여자는 말했다. 짧았던 그 시간이 더없이 좋았고 은혜로웠다고. 남편은 이 세상 모든 것 다 놓고 믿음 하나만 가지고 갔다고. 자기 남편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이었지만 겪어내야 할 모진 세월들을 견디게 할 소중한 시간이었다.

빈소에 걸린 사진에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남편이, 아버지가 웃으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너다 보이는 여학교에서는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소복같이 하얀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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