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넘는, 9천 일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그저 애쓰거나 일한다는 느낌으로 공허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다. 그중 많은 나날들이 죽은 나무에 매달린 마른 잎들처럼 종작없고 따분했다. 21쪽.
그로부터 사흘 뒤인 3월 15일- 나는 그 날짜를 언제까지고 기억할 터였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드럽고 서늘한 봄날 늦은 오후였다. 아몬드 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크로커스들이 싹을 틔운 가운데, 북쪽 하늘은 이탈리아의 하늘같은 색조를 띄어 대청색과 해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앞쪽에 있는 호엔펠스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는 머뭇머뭇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앞지르기가 뭣해서 걸음을 늦췄지만 멈춰 서지는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고 그가 내 머뭇거림을 오해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그가 돌아서더니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어색하고 서툴게, 여전히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내 떨리는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안녕, 한스> 그가 인사를 건넸고 별안간에 나는 밀려오는 기쁨, 안도감, 놀라움과 함께 그 역시 나처럼 수줍음이 많고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51쪽.
다음 몇 달 동안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봄이 와서 온 천지가 벚꽃과 사과꽃, 배꽃과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꽃들의 모임이 되었고 미루나무들은 그 나름의 은빛을, 버드나무들은 그 나름의 담황색을 뽐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 그리고 높다란 박공식 공화당이 있는 작은 중세 마을이며 그런 마을의 분수대들, 기둥 위에서 물을 내뿜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그 분수들은 뻣뻣하고 우스꽝스럽게 중무장을 하고 수염을 기른 슈바벤의 공작들이나 경애하는 에버하르트, 폭군 울리히 같은 이름을 지닌 백작들의 조각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카어 강은 버드나무가 심어진 섬들을 돌아 유유히 흘렀고 그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 56쪽.
좋아, 그렇다면. Tu l’as voulu, George Dandin, tu l’as vonlu (이건 네가 초래한 거야. 조르주 당댕, 자업자득이라고). 네가 진실을 원한다고 했으니 이제 알려 주지. 너도 보았다시피,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걸 보지 않을 수 있었겠냐만, 나는 너를 인사시킬 수가 없었어. 그 이유는, 모든 신들에게 맹세하건대, 부끄러운 것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그 점을 너는 잘못 알고 있어.- 훨씬 더 단순하고 더 불쾌한 거야. 우리 어머니는 명망 있는-한때 왕가였던- 폴란드 귀족 집안 출신인데 유대인을 싫어해. 몇백 년 동안 어머니 집안에 유대인이라고는 없었고 그들은 농노보다도 더 비천한, 이 세상의 최하층민, 불가촉천민들이었어. 어머니는 유대인을 혐오해. 유대인을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들을 두려워해. 만일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는데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네 아버지 하나뿐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그분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야. 너를 만나 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절대로 하지 않을 거고. 어머니는 너를 경계하고 있어. 유대인인 네가 자기 아들을 친구로 삼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게 남들 눈에 띄는 걸 호엔펠스 가문의 오점이라고 생각해. 117쪽.
그는 다시는 나를 자기 집으로 부르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그런 꾀바름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우리는 전에 그랬던 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났고 그도 우리 어머니를 보러 왔지만 차츰차츰 횟수가 줄어들었다. 상황이 다시 전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우정과 어린 시절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122쪽.
그 이후로 나는 그를 피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남들 눈에 띄면 그는 곤란해지기만 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가 내 결정을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내게 여간해서 말을 걸지 않았다. 근육질 막스도 재킷에 은으로 된 조그만 하켄크로이츠를 붙이라는 지시에 따랐고 더 이상 내게 시범을 보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까지도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좋았다.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길고 잔인한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를 인도하던 불빛들도 이미 가물가물 흐릿해져 있었다.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