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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Nov 01. 2024

프레드 울만,『동급생』

너무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름다움이 소설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역사를 관통하는 비극이 흘렀지만 그 비극까지도 아름다운 배경처럼  녹아드는 소설이었다.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이다.


『동급생』은 유대인이지만 독일인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이 강한 아버지와 함께 200년 이상을 살아왔던 슈바벤이라는 곳에 몰아닥친 히틀러의 유대민족 숙청 시대, 인종 청소를 위해 시체들을 녹여 비누로 만들던 광기의 폭력 시대를 관통하면서 꽃 피우지 못한 유대인 소년과 독일 귀족 소년의 우정 이야기이다.


저자인 프레드 울만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화가이자 변호사, 소설가이다. 책의 앞표지에 나온 프레드 울만에 대한 소개이다.  

프레드 울만은 2017년에 『동급생』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동급생』은  프레드 울만의 자서전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프레드 울만과 소설 속의 한스와는 30년 이상되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시간을 달리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하였던 울만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의 뒤표지에 있는 『동급생』에 대한 평이다.

동급생』 읽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는 '아름답다'이다. 울만이 1971년  『동급생』 첫 출간할 때 서문을 썼던 유명소설가인 아서 케스틀러는 " 이 소설을 작은 걸작으로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작은 minor>이라는 의미가 책의 크기가 작다는 것, 그리고 주제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인데도 향수 어린 단조 minor로 쓰였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아서가 말한 대로 『동급생』은 150쪽에 불과한 중편소설이다. 마음먹고 읽으면 앉은 자리에서 2시간 이내에 읽어낼 수 있는 분량으로 중간에 쉴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소설의 내용 역시 아서는 "가장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이야기에 아름답고 시적인 음악의 특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라고 평하였다  

 

『동급생』은 '한스 슈바르츠'라는 주인공의 1인칭 독백으로 서술되는 10대의 우정에 관한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시점은 대신 죽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와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30년이 지난 뒤에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16살의 소년 '한스 슈바르츠'의 삶 속에 뛰어든 친구 '그라프 폰 호엔펠스, 콜라딘'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넘는, 9천 일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그저 애쓰거나 일한다는 느낌으로 공허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다. 그중 많은 나날들이 죽은 나무에 매달린 마른 잎들처럼 종작없고 따분했다. 21쪽.  

한스 슈바르츠는 유대계 독일인이다. 슈바벤에서 200년이 넘게 자리 잡고 살아오면서 유대인 의사의 아들, 랍비의 손자이자 증손자, 하찮은 상인과 가축 장수라는 유대인 혈통보다 독일인이라는 자부심이 가득 찬 집안에서 독일인으로 성장한다.  


한스는 독일 서남부 슈투트가르트의 명문 학교인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에 다니지만  친구가 하나도 없다. 한스에게 친구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기의 완전한 믿음과 충절과 자기 희생에 감복할 수 있는 아이여야 했는데 그런 우정의 로맨틱한 상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독일 역사책에 전해지는 900년 역사의 명문 백작 가문의 아들이 전학해 온다. '그라프 폰 호엔펠스, 콜라딘'이라는 아이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당당함과 예의바름과 우아함, 잘 생긴 용모를 갖춘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반 아이들은 모두 콘라딘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예의 바르게 거절하던 콘라딘은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은밀하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던 한스에게 말을 걸어오며 친구가 되기를 청한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3월 15일- 나는 그 날짜를 언제까지고 기억할 터였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드럽고 서늘한 봄날 늦은 오후였다. 아몬드 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크로커스들이 싹을 틔운 가운데, 북쪽 하늘은 이탈리아의 하늘같은 색조를 띄어 대청색과 해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앞쪽에 있는 호엔펠스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는 머뭇머뭇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앞지르기가 뭣해서 걸음을 늦췄지만 멈춰 서지는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고 그가 내 머뭇거림을 오해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그가 돌아서더니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어색하고 서툴게, 여전히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내 떨리는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안녕, 한스> 그가 인사를 건넸고 별안간에 나는 밀려오는 기쁨, 안도감, 놀라움과 함께 그 역시 나처럼 수줍음이 많고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51쪽.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고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언제나 같이 학교를 나서고 아침마다 콜라딘이 한스를 기다려 같이 학교에 가는 꿈같은 날들을 보낸다.   

다음 몇 달 동안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봄이 와서 온 천지가 벚꽃과 사과꽃, 배꽃과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꽃들의 모임이 되었고 미루나무들은 그 나름의 은빛을, 버드나무들은 그 나름의 담황색을 뽐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 그리고 높다란 박공식 공화당이 있는 작은 중세 마을이며 그런 마을의 분수대들, 기둥 위에서 물을 내뿜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그 분수들은 뻣뻣하고 우스꽝스럽게 중무장을 하고 수염을 기른 슈바벤의 공작들이나 경애하는 에버하르트, 폭군 울리히 같은 이름을 지닌 백작들의 조각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카어 강은 버드나무가 심어진 섬들을 돌아 유유히 흘렀고 그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 56쪽.

어느 날 한스는 콘라딘을 자기집으로 초대한다. 한스의 어머니는 콘라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데  한스의 아버지는 백작 신분인 콘라딘에게 지극한 경의를 표하며 깍듯하게 대하여 한스를 곤란하게 한다. 그 뒤 콘라딘은 일주일에 서너 번씩 한스의 집에 들렀고 한스의 어머니는 콘라딘을 그 집의 또 다른 아들처럼 다정하고 편안하게 맞는다.

 

콘라딘은 한스의 집에 드나들면서도 한스를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후에 콘라딘은 한스에게 자기의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호엔펠스가의 방패 문장을 든 독수리상이 올라앉아 있는 웅장한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 3층에 있는 콘라딘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한스는 열려 있는 맞은편 방의  화장대 위에 걸려 있는 군인 장교들의 사진들 속에서 히틀러 비슷한 군인의 사진이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그  후에도 몇 번 콘라딘은 한스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다가 한스는 콘라딘이 부모님이 안 계시는 날에만 자기 집으로 부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슈바벤에 있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리는 오페라를 보러 간 날, 한스는 콘라딘 집안의 위용을 직접 목격한다. 객석을 가득 메운 우아한 청중들은 그 자리에 참석한 공화국 대통령에게는 관심이 없고 객석의 맨 앞줄 옆의 문을 통해 천천히 입장하는 호엔펠스 가족에게 주목한다. 900년 동안 계승해 온 백작 가문의 명예와 권위를 가지고 객석을 둘러보며 청중에게 인사하는 호엔펠스 가족들 속에 당당하게 서 있는 콘라딘은 한스와 눈이 마주치면서도 모른 척한다. 휴식시간에 콘라딘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던 한스를 콘라딘은 여전히 외면한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한스는 콘라딘에게 전날 자신을 모른 척한 것에 대해 질문한다. 콘라딘은 한스의 질문에 망설이다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좋아, 그렇다면. Tu l’as voulu, George Dandin, tu l’as vonlu (이건 네가 초래한 거야. 조르주 당댕, 자업자득이라고). 네가 진실을 원한다고 했으니 이제 알려 주지. 너도 보았다시피,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걸 보지 않을 수 있었겠냐만, 나는 너를 인사시킬 수가 없었어. 그 이유는, 모든 신들에게 맹세하건대, 부끄러운 것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그 점을 너는 잘못 알고 있어.- 훨씬 더 단순하고 더 불쾌한 거야. 우리 어머니는 명망 있는-한때 왕가였던- 폴란드 귀족 집안 출신인데 유대인을 싫어해. 몇백 년 동안 어머니 집안에 유대인이라고는 없었고 그들은 농노보다도 더 비천한, 이 세상의 최하층민, 불가촉천민들이었어. 어머니는 유대인을 혐오해. 유대인을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들을 두려워해. 만일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는데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네 아버지 하나뿐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그분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야. 너를 만나 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절대로 하지 않을 거고. 어머니는 너를 경계하고 있어. 유대인인 네가 자기 아들을 친구로 삼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게 남들 눈에 띄는 걸 호엔펠스 가문의 오점이라고 생각해.  117쪽.  

그 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만났지만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는 나를 자기 집으로 부르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그런 꾀바름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우리는 전에 그랬던 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났고 그도 우리 어머니를 보러 왔지만 차츰차츰 횟수가 줄어들었다. 상황이 다시 전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우정과 어린 시절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모두 알고 있었다.122쪽.

히틀러의 광풍은 생각보다 빨리 슈바벤에  몰아닥친다. 그동안 어떤 기술이나 정치도 침범하지 못했던 인문학의 성전과 같았던 학교에 유대인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한스에게 대놓고 모욕하고 도전하는 아이들과 몸싸움까지 벌어지는 상황이 생겼다. 학교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후 한스는 콘라딘이  자기를 기다리고 위로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콘라딘은 가고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를 피했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남들 눈에 띄면 그는 곤란해지기만 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가 내 결정을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내게 여간해서 말을 걸지 않았다. 근육질 막스도 재킷에 은으로 된 조그만 하켄크로이츠를 붙이라는 지시에 따랐고 더 이상 내게 시범을 보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까지도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더 좋았다.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길고 잔인한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를 인도하던 불빛들도 이미 가물가물 흐릿해져 있었다. 132쪽.  

12월 초, 한스의 부모님은 한스를 미국으로 보내기로 하고 학교를 그만두게 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스는 두 통의 편지를 받는다, 하나는 '조그만 유대놈'이라고 조롱하는 급우의 편지와  ' 친애하는 한스'로 시작하는 콘라딘의 편지였다.


콘라딘은  '자신은 히틀러가 물질주의와 볼셰비즘으로부터 독일을 구할 수 있고 잃어버렸던 독일의 도덕적 우월성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그를 추종하는 나치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도 언제까지나 한스를 기억한다면서  '너의 콘라딘 폰 호엔펠스'라는 서명으로 변함없는 우정을 다짐한다.


한스를 미국으로 보내고 200년이 넘게 조상 대대로 슈바벤에서 면서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의사로 평생을 독일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던 아버지는 나치대원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조롱과 모욕을 당하자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한다.

 

미국으로 건너 간 한스는 변호사가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가진 성공한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는 독일인은 가능한 한 피하고 독일어로 되어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심지어 독일어조차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독일에 관한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한다.


독일을 떠난 지 삼십 년이 지난 어느 날, 한스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산화한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는 호소문과 인명부를 우편으로 받는다. 한스는 편지와 함께 동봉된 인명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4백 명 이상의 동창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는 호소에 인명부를 읽어 내려가던 한스는 같은  반이었던 마흔여섯 명 중에서 스물 여섯 명이 천년제국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명부를 훑어내려 가면서도 H로 시작되는 명단을 보지 않던 한스는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굳게 먹고 떨면서 H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펼쳐 읽는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


이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얼마나 먹먹하고 착잡했던지....


마지막 문장이 주는 충격과 반전은 엄청났다. 마치 번개에 감전된 것 같이 숨이 막혔다. 이렇게 끝날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너무 허망하기도 하고 그동안 팽팽하게 조여왔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서 한없이 허탈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지켜진 것에 안도하였고 한스가 콘라딘의 진심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책장을 덮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이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파괴되지 않고 지켜졌음에 감사하는 안도의 한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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