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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Nov 08. 2024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참으로 이상한 책을 읽었다. 독서란 참 좋은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고 고정된 생각을 뒤집는다.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던 인식의 한계를 확장시켜 주고 다른 각도의 관점을 보게 한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나에게는 새로운 관점, 놀라운 반전, 숨기고 싶었던 무의식적 본능의 끝을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프고 찔렸지만 이런 심연에까지 이르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인 C.S. 루이스에 대해서는 책의 앞표지 날개에 나온 소개를 인용한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대한 전체적인 서평은 책의 뒤표지에 있는 유진 피터슨의 평가를 인용한다.


루이스는 이 글의 저작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악마의 삶을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98쪽.

또한 루이스는 이 책이 도덕적, 금욕적 신학 연구의 열매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의 사악함을 보게 하였다고 하였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전체적인 형식은 스크루테이프라는 고참 악마가 자기의 조카이자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쓰여졌다. 내용은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웜우드에게 보낸 31편의 글 속에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약점이 무엇이며 어디를 어떻게 공략하면 성공하는지의 비법을 전수하여 조카의 악마로서의 역량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아 글의 시점과 관점 또한 색다르다. 보통의 글이라면 선인의 입장에서 선한 목적으로 교화하거나 변화시키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글은 주인공도 악마요, 내용 또한 어떻게 인간을 넘어뜨리고 미끄러지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악마와 하나님의 구별에 혼란이 왔고 악마가 말하는 목적이 선한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려는 내 선입견에 혼란이 왔다. 그러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런 관점으로도 글을 쓸 수 있구나, 왜 이런 시각을 생각하지 못했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이 편지의 발신자인 오래된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 이 편지의 수신자이자 유혹의 기법을 전수받는 신참 악마인 조카 웜우드, 그리고 악마들이 무너뜨리고자 타깃으로 삼는 인간인 환자(악마의 타깃이 되는 인간을 말한다.) 스쿠루테이프를 비롯한 악마의 세계에서 원수라고 생각하는 원수(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책의 맨 앞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실려 있다.

이 편지를 읽는 여러분은 악마가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크루테이프가 하는 말 중에는 심지어 그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조차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들이 많습니다. - 서문


루이스는 흔히 사람들이 악마를 하나님과 대척점에 서 있는 동격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바로잡는다.

가장 흔한 질문은 내가 정말로 ‘악마’(the Devil)를 믿느냐는 것이다. 만일 그 ‘악마’가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자존적이되, 하나님과 반대되는 권세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내 대답은 분명 ‘아니요’이다. 하나님 외에 영원하고 자존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완전한 선에 대적하는 ‘완전한 악’을 얻을 수 없다. 191쪽.
따라서 정말 악마를 믿느냐고 묻기보다는 악마들(devils)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 더 적절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나는 천사들의 존재를 믿으며 그들 중 일부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의 적이 되었고, 따라서 인간의 적이 되었음을 믿는다. 이렇게 타락한 천사들을 우리는 ‘악마들’이라고 부른다. 악마들은 선한 천사들과 본질이 아예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이 부패한 존재들이다. 악인이 선인의 반대이듯이 악마는 천사의 반대이다. 악마들의 지도자 내지 독재자인 사탄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미가엘과 반대되는 존재인 것이다. 191쪽.


악마 쪽에서 보는 쓰러뜨려야 하는 대상인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인간은 양서류다. 반은 영이고 반은 동물이지(원수가 그렇게 역겨운 잡종을 창조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은 우리 아버지께서 원수를 지지하지 않기로 하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는 한편, 동물로서 유한한 시간 안에 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육체와 정욕과 상상력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게야. 시간 안에 있다는 건 곧 변한다는 뜻이니까. 52쪽.

헷갈리지 마시라. 여기에서 말하는 원수는 하나님이고, 우리 아버지는 마귀의 우두머리인 사탄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자만에 대해 조카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잊지 말거라. 인간들은 자신이 동물이며, 따라서 육체가 하는 짓들이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노상 잊고 산다. 그들은 악마가 자기네 마음 속에 이런저런 것들을 불어넣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만, 그야말로 웃기는 알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최대 과업은 그들의 마음 속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니냐. 32쪽.


루이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익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원수가 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이유는, 이 구역질나고 하찮은 인간 버러지들을 이른바 ‘자유로운’ 연인이자 종 -원수가 쓰는 말로 하자면 ‘아들’-으로 삼겠다는 망측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인데, 이 두 발 달린 짐승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집요한지 변태적인 관계도 서슴지 않으면서 영적 세계 전체를 모독하고 있는 형편이다. 원수는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인간 앞에 목표를 세워 놓고서도 단순한 감정이나 습관을 이용해서 끌고 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지. ‘제 힘으로’ 해 내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게야.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위험도 따른다는 걸 명심하도록. 처음에 찾아오는 무미건조함만 성공적으로 이겨내면 인간들도 점차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되고, 우리는 그만큼 유혹하기 힘들어지니까. 24쪽.
우리한테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식량에 해당한다. 인간의 의지를 흡수해서 우리 자아의 영역을 확장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나 원수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이와 전혀 다르지. 원수가 인간을 사랑한다느니 원수를 섬기는 게 외려 완벽한 자유라느니 하는 말들이 단순한 선전 문구가 아니라(우리야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만) 소름끼치는 진실이라는 점은 우리도 직시해야 한다. 53쪽.


루이스가 악마들이 인간을 공략해야 하는 부분과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에 비추어 몇 가지를 소개한다.


먼저, 막연한 상상이나 생각만 하고 실제적인 행동은 하지 못하게 한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까지 막을 수 없다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적어도 그 기도가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은 있지. 고도로 ’영적‘인 기도만 줄창 읊어대게 하여라. 어머니의 류머티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그 영혼의 상태만 가지고 노심초사하게 만들라구. 27쪽.
여하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 습관은 반복될수록 약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81쪽,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환자의 영혼에는 어느 정도의 악의와 함께 어느 정도의 선의가 있게 마련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만약 환자가 제 어머니나 고용주나 기차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 따위를 사랑하는 몹쓸 버릇을 기르게 된다면, 독일군에 대한 증오에 아무리 기름을 퍼붓고 부채질을 해 봤자 전혀 쓸모가 없다. 45쪽.


삶과 죽음에 대한 악마의 계략도 있다. 삶을 모든 수단을 다해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죽음을 어떤 수단으로든지 피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이끈다.

 전쟁통에 얼마나 바람직하지 못한 죽음들이 속출하는지도 한번 생각해 보거라. 인간들은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곳에서 죽는다. 그러니 원수 편에 있는 인간들은 그야말로 완전한 채비를 갖추고 죽음을 맞이하는 셈이지. 그보다는 모든 인간이 값비싼 요양원에서 죽는 게 우리한테는 훨씬 더 좋은 일이야. 거기에서는 우리에게 잘 훈련받은 거짓말하는 의사, 거짓말하는 간호사, 거짓말하는 친구들이 죽어가는 환자한테 살 수 있다고 장담하며, 아픈 사람은 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믿음을 부채질하고, 더 나아가 우리 일꾼들이 제 역할만 해 준다면 성직자가 환자한테 제안하는 것들을 죄다 보류시킴으로써 실제 상황을 은폐할 수도 있지!. 40쪽.
물론 인간들은 죽음을 최악으로, 그리고 생존을 최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건 다 우리가 교육시킨 결과야. 우리가 퍼뜨린 선전에 우리가 놀아나서야 되겠어? 163쪽.
원수한테 인간의 출생이란 죽을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이기에 중요하고, 죽음이란 오직 다른 종류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에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166쪽.


대의명분이나 사회 운동의 허상을 이용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네가 경계해야 할 것은 환자가 현세의 일들을 원수에게 순종할 기회로 삼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이런 조건에서는) 더 그렇지. 이 아래에는 그런 인간들이 우리 한가득 득실거리는 판이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주마. 51쪽.
 우리가 바라는 바, 정말 간절히 바라는 바는 인간들이 기독교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출세 수단으로 이용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그게 안된다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라도 -하다 못해 사회정의를 위한 수단으로라도 – 삼게 해야지. 이 경우 ‘사회 정의는 원수가 요구하는 것이므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일단 믿게 한 후, ‘기독교는 그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므로 가치 있다’고 믿는 단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136쪽.


요즘 사회적 열풍으로 불고 있는 미식과 탐식도 악마는 자기의 성공한 계략이라고 주장한다.

지난번 편지에서는 탐식을 인간의 영혼을 낚는 수단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던데, 그건 오로지 네가 무식한 탓이야. 지난 일백 년간 우리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과는 바로 이 주제에 관해 인간의 양심을 완전히 마비시켰다는 거라구. 이제는 유럽 전체를 위아래로 아무리 훑어보아도 탐식에 대해 설교한다거나 탐식 때문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지. 이게 다, 많이 먹는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찾아먹는데 욕심을 부리도록 총력을 집중한 결과다. 99쪽.


요즘 세대의 결혼관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의 공작 덕분에 인간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 이외의 동기로 결혼한다는 걸 그야말로 저열하고 냉소적인 행동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서로 돕고 순결을 지키며 후손에게 생명을 물려주기 위해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보다 훨씬 더 저급한 걸로 여긴다구( 환자가 결혼예배를 몹시 불쾌하게 여기도록 손쓰는 일도 잊지는 않았겠지?) 108쪽.

루이스의 글 중에는 정말 들키기 싫은, 우리 서로 알지만 모른 척하는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들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 그러니까 진짜 벌거벗은 영혼으로 기도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할 때, 인간들도 사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도움이 될게다. 36쪽.


마지막으로 1941년에 쓰여진 C.S. 루이스의 다음 글에서 악마가 이룩하고자 하는 지옥의 모습이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과 지나치게 흡사하다고 느끼면서 우리 사회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지옥을 그릴 때, 모두가 끊임없이 자기의 체면과 성공에만 신경을 쓰며, 모두가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모두가 시기와 자만심과 원망이라는 치명적일 만큼 엄숙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나머지 상징들은 아마도 나의 개인적 성향과 시대 상황에 많이 좌우되었을 것이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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