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는 예쁘고 화려하였다. 영리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욕심과 당참을 지니고 있었다. 유복한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나 부러움 없이 살았다. 아버지는 사업에 성공하였고 어머니와 언니들과 즐겁고 행복하였다. 행복했던 유년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던 정화의 행복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끝이 났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바깥일을 알지 못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을 건사하지 못해 사업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었다. 가장 잃고 가난해진 집안에는 크고 작은 우환들이 계속 밀려들어 늘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어느 날, 친구가 바람을 쐬러 가까운 절에 가서 며칠 쉬다 오자고 하였다.
절은 고즈넉하고 호젓하였다. 암자에는 주지스님과 함께 고시공부를 한다는 나이 든 남자가 있었다. 절 사정을 잘 아는 친구 덕분에 주지스님과 남자와 함께 며칠을 잘 지냈다. 친구가 시내에 볼 일이 있다고 절에서 내려가면서 금방 오겠다고 했다. 친구가 떠난 날 밤, 나이 든 남자는 정화의 방으로 들어왔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화는 그 일을 하룻밤의 사고로 정리하지 못하였다. 방심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렇게 속절없이 빼앗긴 자신의 젊음이 한심하였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며칠을 절에서 더 보냈다. 친구는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자기를 소개하며 하소연하는 남자의 사연은 기가 막혔다. 정화는 세상에서 그렇게 불쌍하고 짠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정화보다 나이가 13살이나 많았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잃어 부모님에 대한 기억마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떠돌아다니던 사고무친한 혈혈단신 신세였다. 정화를 만났을 때는 폐결핵을 앓아 절에 얹혀서 요양하던 때였다. 정화는 자신의 꺾여진 인생과 남자의 버려진 삶이 동일시되면서 매달리는 남자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기가 버리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남자를 거두기로 하였다.
정화는 집에 돌아가 결혼하기로 한 남자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패물을 들고 나와 남자와 살림을 시작하였다. 친정 언니에게 돈을 빌려 두부와 콩나물을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났다. 남자는 얌전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였다. 정화에게도 분에 넘치는 사람이라고 깍듯하게 대하였다.
그런데 술이 문제였다. 한 번 술이 들어가면 자기 인생에 대한 울분과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정화를 괴롭혔다. 정화의 몸에는 피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정화의 집에서는 자주 정화의 비명 소리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이 전쟁 같은 날이었고 날마다 이혼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폐인이 되어 자기를 찾아오는 남자가 보였고 아버지를 버린 엄마를 원망하는 아들이 눈에 밟혔다. 정화는 결국 자기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면서 견뎠다.
그런 와중에 이상하게 살림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정화가 손을 대는 일마다 잘 되었다. 작은 가게로 시작한 장사는 빵집을 거쳐 백화점에 옷 가게를 낼 정도로 번창하였다. 부동산과 원룸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시류를 보는 눈과 때가 잘 맞아 돈은 쉽게 굴러들어 왔다.
정화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사업이 번창하고 정화가 바빠질수록 남자는 정화를 의심하면서 자기의 무능함을 폭력으로 풀었다. 알코올중독에 의처증에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약으로 조절해야 했다. 아들은 병들어 폐인이 된 아버지를 안쓰러워했다. 어린 아들이 정화에게 말했다. "나 낳으려고, 아버지를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잘할게요."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던 해, 일주일이 멀다고 병원을 들락거리던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죽음으로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정화는 전쟁 같았던 자기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자기나 남편이나 둘 다 불쌍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래도 피지 못한 자기의 삶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아들을 낳은 것이었고 아들 하나 남겨 준 것만으로도 남편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 끝까지 가정을 지키고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지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정화의 일생과 바꾼 것 같은 아들은 잘 자라 주었다. 엄마의 아픈 삶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엄마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속 깊은 아들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같은 직장에서 만난 처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다행히 며느리는 남편을 이해하고 시어머니의 삶을 인정하는 속 깊은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된 정화에게 살갑게 하면서 잘 모시려고 노력하였다. 거기다 딸 손녀까지 안겨 주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매 주말마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와서 식사를 같이 하고 함께 외출하고 손녀딸의 재롱을 보여준다.
정화는 자기 인생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행복과 기쁨을 새롭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기대하지 않은 결혼이었고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이었지만 결혼 때문에 얻은 아들은 고달프고 힘들었던 결혼생활을 상쇄시키고도 남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남편으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아들의 아버지로는 고맙고 안타깝고 애처로웠던 사람으로 기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