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이는 수학 선생님이었다. 감나무 과수원을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조신하고 조용하게 자라났다. 아버지에게 주현이는 공부 잘하고 얌전하여 버릴 데 없는 맏딸이었다. 그런 주현이가 도시에 있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여 교사자격증을 얻고 꽤 큰 섬의 고등학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한 것은 부모님에게 커다란 자랑이었다.
섬에서 교사를 하던 주현이는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그곳 토박이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남자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다.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제멋대로 성장하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안타깝게 여길 뿐이었다. 어렵게 육지로 학교도 보냈지만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섬으로 들어와서 뒹굴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세상과 집에 대한 반항과 울분을 남자는 북을 치는데 쏟아부었다. 남자의 북솜씨는 대단하여 섬에서는 알아주는 북쟁이였고 전국대회에서 몇 차례 상을 받기도 하였다. 남자는 생계를 위해서 집집마다 세금을 징수하러 다니는 일을 했다. 낮에는 각 가정과 상가를 돌며 딱지를 떼고 밤에는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풍악을 즐기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남자가 세금 고지서를 가지고 주현이에게 왔다. 동네잔치에서나 행사장에서 남자의 북 치는 모습을 눈여겨보던 주현이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높디높은 선생님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송구하고 황송하였다. 그런데 그 뒤로 남자는 학교에 자주 나타났다. 학교가 파할 무렵이 되면 주현이를 바래다주기도 했고 함께 바닷가로 나가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말이 없던 남자가 출구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슬쩍 비치기도 하였다.
안쓰러운 생각에 주현이는 남자에게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남자의 북 치는 실기 솜씨야 이미 인정받은 것이지만 섬에서 썩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고등학교부터 때려치운 공부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섬마을의 민속을 조사하러 드나드는 교수님이 섬에 왔을 때 교수님을 찾아갔다. 공부하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대학을 가려면 우선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청년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자기의 인생에 희망이 보이자 무섭게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곁에는 항상 주현이가 붙어서 모든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그렇게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은 무던히도 반대하던 주현이의 부모님을 설득하여 결혼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신혼의 부부가 검정고시 합격증을 가지고 다시 교수님을 찾았다. 남자의 영특함을 익히 알던 교수님은 국악과가 있는 대학을 소개하고 그곳의 입시 기준에 맞추도록 선생님들을 붙여주었다. 실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기에 남자는 거뜬하게 대학에 합격하였다. 대학에 들어간 남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연희판을 누비고 다녔다. 국악과 교수님들과는 협연자로 동행하였다. 남자가 대학에 다닐 동안 주현이는 여전히 섬마을에 남아 선생님을 하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두 아들을 키워냈다.
대학을 졸업하자 남자는 대학원에 가고 싶어 했다. 주현이는 두말없이 남자를 대학원에 진학시켜 석사를 거쳐 박사학위까지 따도록 하였다.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자는 모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얻어 강의를 하였다. 조금만 타협하면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워낙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남자는 대학의 조직사회를 견뎌내지 못하고 재야의 학자로 남게 되었다. 남자는 발을 넓혀 해외로 나가 그쪽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공동의 연구작업을 개발해 나갔다.
그 사이에 두 아들은 자라 대학생이 되었다. 주현이도 육지로 옮겨 같이 살게 되었다. 남자는 여전히 국내로, 외국으로 드나들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남자를 알아보는 주현이의 밝은 눈이 아니었다면 남자는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무엇을 보고 주현이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을까? 알 수 없는 인연이고 알 수 없는 결혼의 신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