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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Day Jan 12. 2023

'외로움'에 대한 시작

외로움에 대해 관심갖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중학교 1학년 말, 우리 집은 동작구에서 강남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나는 공교롭게도 강남구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낮과 밤이 모두 화려한 동네인 압구정동의 한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 학교는 소위 8학군의 하나였고 강남에서 치맛바람 좀 날리는 엄마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학갈 학교 이름이 적힌 통지서같은 것을 받아든 엄마를 다른 엄마들은 그렇게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도 엄마도 나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전학과 거의 동시에 방학이 시작되었고 2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전학간 학교의 명성과 분위기에 실감났었다. 훤칠한 A의 엄마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소설가였고, 여리게 보이는 B는 모 기업 대표의 아들인데 매일같이 기사가 딸린 세단을 타고 학교에 등교했다. 귀엽게 생겼던 C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모 방송국의 PD였고, 누가 봐도 캔디의 이라이자와 닮은 D는 교정기를 끼고 있어서 웃을 때마다 수줍게 손을 가리거나 급하면 교정기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윗 입술로 아랫 입술을 덮어 누르곤 했었다. D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었고 D는 안가본 나라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친구들 아버지의 직업은 지극히 평범했다. 건설 노동자로 하루살이처럼 힘들게 일했던 우리 아버지, 키는 작았지만 활발하고 끼도 많았던 P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하셨고, 통통하고 키가 컸던 H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우리 반 회장의 아버지는 회사의 부장님이었다.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 되면 자기네 집이 얼마나 잘 사는지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명품 가방이며 구두를 보여주고, 좋아보인다 얼마냐 묻고, 집이 몇 평이고 자동차가 얼마나 최고급인지 하는 그런 이야기를 서슴치 않았다. 방학이면 해외로 어학 연수를 가거나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개학 첫날은 방학동안의 해외 여행기를 나누고 새로 득템한 패션 아이템을 구경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나는 반 친구들이 관심갖을 만한 이야깃거리, 자랑거리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친구들과 잘 지내보려고 애썼다. 그동안 알아온 친구들과는 많이 다른 환경의 친구들이었지만 그래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왕따였던 반 친구 K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반에서 가장 키가 작았던 K는 당시 나에게는 낯설었던 치아 교정기를 끼고 있었다. 우리 중학교는 여학생들의 교복이 바지와 치마 두 가지였고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두 가지를 번갈아 입거나 치마교복을 입었는데, K는 줄곧 바지교복이었다. 공부를 꽤 잘 했고 쉬는 시간이면 책을 읽거나 다음 수업 준비를 하는, 말하자면 모범생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지도, 쉬는 시간이면 여느 여학생들처럼 화장실에 함께 가자고 끌려가지도 않았다. 친한 친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K는 씩씩해보였고 혼자 있을 때도 남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반 친구들 사이에서 외딴 섬처럼 혼자였던 K가 늘 외로워보였다. 하루는 K의 그런 모습이 신경쓰여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K는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건낸 인사에 흠칫 놀라듯 한쪽 어깨를 들썩이다가 내 얼굴앞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K는 웃고 있었다. 교정기를 낀 치아가 훤히 드러났는데 손으로 가리지도 얼른 입을 다물지도 않았다. 짧은 커트머리였는데 머리숱이 많지 않아 보였다. 얼굴을 들어올릴 때의 반동때문인지 K의 가느다란 회갈색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머릿결이 무척 좋아보였다. 


어? ... 아, 안녕!


 나는 선희라고 해. 우리 친하게 지내자!



친하게 지내보자는 말에 K는 두 번째 놀랬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사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 같았다. K는 광대뼈가 위로 한껏 올라가 도드라질 정도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은 나머지 크크거리며 새어나오는 K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척 반가웠다. 그때였다. 


아, 짜증나. 저 웃음소리 진짜 듣기 싫어. 야, 웃지마! 보기 싫으니까...   


나는 너무 놀라 누가 한 소리인지 확인하려고 교실을 두리번 거렸고, 항상 머리카락에 무스인지 젤인지를 잔뜩 바르고 남자 어른들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학교에 오는 J였다. 안경을 쓰는 J는 보기 싫은 것을 보았다는 시늉을 하며 안경을 벗어제꼈다. K는 입을 오물거렸지만 자주 겪는 일인듯 당황해하지는 않았다. K의 책상 옆에 서서 말을 걸고 있었던 내가 더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야, 최선희, 쟤 진짜 짜증나는 애야. 쟤랑 놀지마!   


나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J는 큰 소리로 나에게 K와는 말 걸지도, 놀지도 말라는 주문을 걸었다. 뭐라고 대꾸하거나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시간 종이 울렸다. 다행이었다.  




K에게 처음 말을 건낸 그날의 예상못했던 뒷 이야기는 그냥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든 좋아하는 친구, 더 가까운 친구,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가 있는 법이니까. J는 K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 둘은 친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대로 K에게 계속 말을 걸고 음악실에 가거나 운동장에 나갈 때도 함께 가자고 청했다. 

어느 날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교실로 들어왔는데 남학생들 몇명이 빙 둘러서 무리지어 있었다. 친한 애들끼리 뭔가 구경하는가보다 하고 내 자리로 와서 앉았는데, '아뿔싸!' 애들이 몰려있는 곳은 다름아닌 K의 자리였다. 평소에 관심도 주지 않던 K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 우르르 몰려가 있는 것일까 싶었지만 그 무리를 뚫고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왠일일까 궁금해하던 순간 K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 마! 만지지 말라고! 내 꺼야! 



이윽고 K의 말투를 따라하며 빈정거리는 J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 마아~ 만지지 말라고~ 내 꼬야~

J는 K의 학용품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가 바닥에 버리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서커스단처럼 친구 몇 명과 던지고 받고를 하며 K를 약올리고 있었다. K곁에서 진 치듯 함께 서 있던 또다른 애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 박수를 치며 깔깔댔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애들도 구경하듯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K는 어린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흑흑) 하지 말라고... 하지 마. 하지... 하지 말라고... 했, 했잖아.
내, 내, 내가... 말했잖아

 

K의 울음섞인 저항은 J와 그 무리들에게 더 큰 자극제가 되었는지, 밉상맞은 J들은 그 모습마저 따라하며 더 심하게 K를 놀려댔다. 난생 처음 보는 따돌림에 충격을 받은 나는 두 다리가 바닥에 딱 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음 시간 종이 울렸고 J들은 아쉬운 듯 K의 울먹거림을 따라하며 흩어졌다. 종소리가 끝났을 때도 그들의 빈정거리며 놀려대는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여운이 남아 다음 수업을 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댔다. 수업이 끝나고 바로 K에게로 가서 괜찮은지 물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음이 터질것 같은 얼굴로 아무 말없이 나를 올려보던 K가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J들이 있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K와 친구가 되기로 했으니까, 친구가 힘들 때 말을 걸고 위로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J는 대단했다. J는 반 친구들을 넘어서 학교에 어느 학생들도 K와 어울리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J를 따르는 무리, J들을 만들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다. K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닐 뿐더러 옆 반 학생들에게도 K와 아는 척을 하거나 가까이 가지 않도록 선동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넘어가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내가 애쓴 탓도 있지만,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글을 잘 쓴다고 종례 시간에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가 쓴 글을 대신 낭독하시면서 감동하시면서 칭찬해주신 덕분이 컸다. 


우리 반에도 선희 같은 문학소녀가 있어서 선생님은 너무 자랑스럽다. 
오늘 참 감동했다. 너네들도...


J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데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J조차도 선생님앞에서는 무척 깍듯했고 반듯하고 예의있게 행동했다. 담임 선생님의 권위로 나에게는 보호막이 생겼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분위기의 학교였지만 그 보호막 덕분에 학교에서 K에게도 말을 걸 수 있었다. 그 보호막이 영원할 줄 알았다. 갑옷같았던 보호막에도 금이 가는 날이 찾아왔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평소에 비 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엄마가 새 우산을 사주셨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주신 건지, 마트나 행사장에서 기념품으로 받으셨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새 우산이라는 거였다. 새 것이나 좋은 물건에 욕심내는 편은 아닌데, 새 우산 하나에 기분좋게 등교했던 기억을 되살려보면 나도 그저 중학생이었구나 싶다. 


선생님이 없는 쉬는 시간이면 힘 센척 하는 J와 J를 따르는 J들이 교실을 장악하고 다녔다. K는 자주 J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럴때마다 내게 걸었던 J의 주문이 메아리로 다시 되돌아왔지만 나는 J를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K와는 잘 지내려고 했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반복된 일상이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와 교실 앞문을 통해 들어와 K의 자리를 찾아가려고 칠판과 교탁 사이를 지나치는 순간, 내 옆으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스쳐지나갔고 칠판에 그대로 꽂혔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칠판에 꽂혀 박히자마자 날아온 방향에 앉아있던 J가 벌떡 일어나 달려와 칠판에 꽂힌 칼심을 빼냈다. 칠판에 흔적이 남지 않았나 살피더니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내고 지나갔다. 


아,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거기로 날아갔네. 아, 실수! 실수!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했다. 약간 비켜가도록 정확히 내가 겨냥된 것 같았지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라고 쏘아붙일수가 없었다. 좀처럼 진정 안되는 놀란 가슴을 붙들고 그냥 내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에 가려고 책상 옆 고리에 걸어두었던 우산을 꺼냈을 때, 내가 J의 과녁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새 우산이 두 군데나 찢겨져 있었다. 정확히 칼심 자국이었다. 다시 J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야, 최선희, 쟤 진짜 짜증나는 애야. 쟤랑 놀지마!   






집에 가는 길에 우산을 버렸다. 아침에 들고간 새 우산은 학교를 마치고 나서 헌 우산이 되어버렸다. 엄마한테는 버스에서 놓고 내려서 잃어버렸다고 대충 둘러댔다. 엄마는 네 손에 뭐가 남아나겠냐고 새 것을 줘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며 의레 잔소리를 하셨다. 더 큰 충격을 받은 터라 엄마의 뻔한 잔소리도 듣기 힘들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J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K랑 놀지 말라고 했잖아. 자꾸 그러면 너도 K처럼 될 수도 있어. 조심해. 



J는 나를 협박했다. 마지막 경고 같았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남은 중학교 시절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K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눈 인사를 나누고 J를 피해 말을 섞었지만 길지 않았고 깊지 못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우산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K의 필통은 심심치 않게 바닥에 나뒹굴었고 교과서가 찢기기도 했다. K는 나에게 도시락은 혼자 먹겠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외로움에 더 다가갈 수 없었다. 한 발자국을 떼고 다른 한 발은 미처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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