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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햇님 Aug 23. 2019

상견례를 마치자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빠 같은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는 이십대에 미용실에 얼음을 배달해주던 한 남자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얼음만이 아니라 찹쌀도넛이나 군고구마 따위의 간식을 사서 미용실 문을 슬며시 열었다. 별 다른 말도 없이 미용실 소파에 앉아 한참 있다가 가거나 낮잠도 자고 갔다는 수상한 남자. 도대체 왜 내쫓지 않았는지 의아하지만, 어쨌든 둘은 결혼해서 오빠와 나를 낳는다. 

내가 스무살이 될 때까지 우리 집은 조용할 날이 별로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군고구마나 풀빵을 팔기도 했고, 택시기사로도 일했으며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한 적도 있다. 사업 자금은 모두 엄마가 있는 돈을 긁어서 주거나 누군가에게 빌려서 대줬고, 엄마는 아침 9시부터 밤 8시까지 주 6일간 일을 해서 빚과 이자를 갚아나갔다. 정비소가 쫄딱 망해서 아빠가 빈털터리가 되기까지 엄마는 늘 화난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흔한 딸들의 고백처럼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빠 같은 사람 절대 만나지 말아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는 방황을 끝내고 천직을 찾았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들어가 거의 매 해 ‘보험왕’으로 꼽히며 승승장구했다. 금과 상패를 받아왔고, 회사에서 금강산이나 동남아 각지로 여행도 보내줬다. 빚도 다 갚았고, 비싼 내 사립대학 학비도 대줬으며, 모르긴 몰라도 연봉도 꽤 높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한 번씩, 이상한 소릴 하곤 한다. 건물을 사서 탁구장을 하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당구장도 아니고 볼링장도 아니고 왜 하필 탁구? 우리 가족은 무조건 결사반대다. 사업의 ‘사’ 자만 들어도 새파랗게 질리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상견례가 끝나고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던 당시 남자친구를 보면서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아닌지 불안했다. 평소 조용하고 온순한 편인 나는 이날, 남자친구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표독스러운 말들을 쏟아냈다. 고요한 어조로 어찌나 상대를 몰아붙였는지, 30분도 안 되어서 남자친구 눈과 얼굴은 시뻘겋게, 퉁퉁 붓고 말았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자아는 결혼 전에 찾으라고. 부모님께 결혼식 날짜를 미루겠다고 해, 그럼. 

1년이든 2년이든 기다릴 테니까, 하고 싶은 일 찾고 결혼하자고.” 


지금 다니는 회사는 적성에 맞지 않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구체적으로 무얼 만들고 싶은지를 알지 못해서 이제부터 찾을 거라는 대답은 명치를 답답하게 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나는 남편에게 꽤 반해있는 상태였다. 혼자가 익숙한 나였지만, 뭐든 나와 함께 하려고 하는 이 사람 모습이 밉상이 아니었고, 감정에 솔직하고 빈말은 죽어도 못하는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인 점도 좋았는데, 그날 그렇게 따져 물으며 화를 낸 걸 보니 이 사람의 안정적인 직장도 플러스 요인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몇 시간 동안 혼낸 탓인지 신랑은 한동안 조용히 회사에 다녔다. 결혼식 이후 방법을 바꾸어 가끔 내게 바람을 넣긴 했지만. 


“너 영국 좋아하잖아. 내가 영국으로 유학 보내줄게. 6개월 정도 어학연수 받고, 

(퇴사하고 영국으로 간) 나랑 (만나서) 산티아고 길 걷고 돌아오자.”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찰스 디킨스, 조지 오웰, 헤밍웨이, 서머셋 모옴... 내가 사랑한 작가들은 대부분 영국 땅을 거닐었거나 그곳에서 태어났고, 영국을 배경으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런던 여행 에세이를 편집하기도 했던 나에게 영국은 로망 그 자체의 나라였다. 남편은 내게 화두만 던졌을 뿐, 그 다음부터는 내가 자진해서 움직였다. 영어 학원 새벽반에 등록했고, 틈이 날 때마다 유학원 사이트를 드나들며 상담을 요청했다. 그렇다. 우리 집은 작전은 남편이 짜고 행동은 내가 하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남편은 이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내 느낌은 딱 이런데 뭘. 

첫 번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6개월. 신랑은 기가 막히게 계획을 잘 짰지만, 그 계획이 자주 수정된다는 게 함정이었다. 포기를 싫어하는 나는 포기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이 동시에 퇴사, 유학을 희망하는 나라 리스트를 짜고, 6개월간 여행하며 돌아본 뒤 최종 결정을 내리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아직까지도 동기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막연한 어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 


그 유학지가 교토가 된 데에는 또 여러 가지 사연이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독일 등지에 위치한 직업학교와 전문학교를 알아볼 예정이었던 우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 부근에서 소매치기를 당한다. 예산의 절반과 유레일패스, 여권까지 잃어버린 남편(소매치기는 이분이 당했다)은 멍해져서 “어떡하지?”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나는 한 명의 여전사가 되어 그를 이끌고 프랑스 칸느 해변 앞에 있는 경찰서로 갔다. 신고는 마쳤지만, 패스포트 갱신을 하려면 파리로 가야 한다고 했다. 파리에 발이 묶여 우리는 한 달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지나간 추억은 늘 그렇듯, 찌질했던 순간마저 기분 좋은 몇 장의 사진과 무용담으로 남는다.   


큰 맘 먹고 온 유럽이니 다시 만든 임시 패스포트로 다른 도시에도 가고, 더 많은 것을 보고 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전사에게 문제가 생겼다. 태생이 겁쟁이인 여전사는 경찰서에 들어갔다 나오던 순간까지만 용감했다. 나는 칸느에서 파리로 가는 동안, 파리에서 거리를 걷는 동안, 조금이라도 덩치가 크거나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을 보면 경기하듯 놀랐고, 눈치만 살피다가 결국 틈만 나면 꼬인 장을 붙들고 화장실을 찾았다. 나처럼 유료 화장실을 많이 이용한 여행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장 활동은 분주했다. 

남편과 같이 보낸 시간은 대개 이렇다. 남편은 운동화 밑창이 닳아 구멍이 날 정도로 걷는 사람이라서, 나는 늘 그와의 보폭을 맞추느라 좋고 싫음을 길게 느낄 여유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물론 남편은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내 느려터진 걸음에 맞춰 걸을 수 있는 관대한 남자는 자신뿐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테니 말이다. 




다 지난 뒤 떠올리면 우리의 허무했던 여행도 장면, 장면 웃음이 날 정도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여행 당시에는 마치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머릿속이 휑하다. 서울의 남은 살림을 다 정리하고 이민가방과 각자 배낭 하나씩만 메고 교토에 도착했을 때에도, 둘이 지낼 작은 원룸을 구해 이사한 첫날에도, 서른을 훌쩍 넘긴 내가 어학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순간에도 그랬다. 하루를 가만히 정리하고, 내일을 계획할 틈이 부족했다. 달리고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상견례를 마치고 퇴사를 읊조리던 남편의 모습은 몇 년간 잊고 지냈는데, 귀국 얘기가 나왔을 때 불현 듯 생각났다. 


‘아, 이 사람. 딱히 허랑방탕하고 게으른 남자(실상은 못 따라갈 정도로 부지런함)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딘가 위험해. 내 삶을 조종하고 있어.’ 


문제의 위험한 남자. 사진, 화초 키우기, 커피 내리기가 취미.

기억이라는 건 주관적이어서 우리 부부는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도 나중에는 각자 딴소리를 한다. 상대적인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나는 입버릇처럼 나 스스로를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유리한 기억을 글로 나열하고 있겠지. 그래도 아직 할 말은 많다. 그저 조용히, 묵묵히, 성실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내게 지금의 삶은 지나치게 빠르고 숨 가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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