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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햇님 Aug 30. 2019

얼마 없는 재산, 이렇게 쓸 일인가?

경제관념이 다른 남녀가 만나면 벌어지는 일


“주변에 결혼을 고민하는 친구나 후배가 있다면 나는 진지하게,

둘의 경제관념이 얼마나 다른지를 따져보라 말하겠다.”


남편과 나는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부분이 훨씬 많다. 너무 당연한 말을 비장하게 한 것 같아서 좀 우습긴 하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종은 크게는 피부색과 태어난 나라 등으로 나누지만, 기준을 정할라 치면 어떤 척도로도 유형을 나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내가 느끼기에 우리의 가장 큰 다름은 바로 이 경제관념에 있다.  

이를테면 나는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제대로 용돈을 받아 쓴 경험이 없다. 등굣길, 엄마는 바쁘지 않으면 내 교복 주머니에 천 원짜리 지폐 한두 장을 구겨 넣어줬고, 나는 그 돈으로 학교가 끝나고 떡볶이를 사먹었다. 남은 돈은 생각날 때마다 은행에 들러 저금을 했다. 문제집이나 준비물 살 돈은 그때그때 엄마에게 타서 썼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빌리면 그만이었다. ‘쌈짓돈이 주머닛돈’이라더니 내 주머니는 늘 빈곤했고, 내 한 입 간식 챙길 여유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오랜 습관이 무섭긴 무서운 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한참 동안, 신용카드를 만들지 못했다. 카드가 필요할 만큼 씀씀이가 크지 않았던 것도 이유일 테지만, 무엇보다 카드를 긁는 순간 내 인생이 밑도 끝도 없는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까 두려웠다. 요령 있게 잘만 쓰면 오히려 이득인 카드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신용 등급이랄지, 여러 가지 할인 혜택, 포인트 제도에 어두웠고, 재무를 알지 못해서 정직한 일개미로 출퇴근하며 돈을 불리지 못한 채 이십대를 보냈다. 그래도 내 나름은 풍족했다. 퇴근 후 먹고 싶은 재료를 사와서 집에서 요리도 해먹었고, 읽고 싶은 책은 살 수 있는 여력도 생겼다. 무엇보다 친구들 혹은 직장 동료와 카페에 가서 달콤한 디저트를 사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여담이지만, 결혼 전까지를 인생 1분기로 친다면 내 생에 가장 큰 탕진은 치아교정이었다. 가지런한 치아를 얻게 되기까지 몸도 마음도 내 통장도 다 같이 고생을 했더랬다.

나와 달리 남편은 샘이 정확하고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 검소한 사람이지만, 아니다, 그런 듯 보이지만, 가끔 이해 안 가는 것에 꽂혀 거금을 휙 써버릴 때가 있다. 교통비가 아깝다며 주로 걷는 남자가 10만 원, 20만 원이 훌쩍 넘는 물건을 보며, “이 정도면 가격 괜찮은데?”라고 말하며 그걸 또 사자고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바람직할지 고민이 된다. 같이 결정해서 사놓고 뒤에서 딴소리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진심 사길 원해서 돈을 쓰라고 허락한 적은 없다. 사고 싶어 하는 게 뻔히 보여서 더 말릴 기운이 없었다고 말하면, 남편은 또 내게 배신감을 느끼겠지?

사고 싶은 것을 사서 자기만의 기회비용을 충족시키는 건, 성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거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문제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 그 정도로 넉넉하지 않다는 데 있다. 엥겔지수가 높아서 식사와 디저트 비용에 집중하는 나와 문화 콘텐츠나 생활 가구 등 인테리어 전환에 비용을 투자하고 싶은 남편(적고 보니 결국 우리 집엔 쓰는 사람만 있다). 이 어마어마한 차이는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결혼을 이미 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아직 하지 않았다면 냉정하게 고민해볼 문제이다. 그래도 답은 정해져 있다는 거, 알고 있다. 서로 좋아서 날 잡겠다는데, 이런 말 누가 듣기나 하겠어?




지금부터 우회적으로 우리의 다른 경제관념을 취미에 빗대어 얘기해 보려 한다. 남편의 취미 중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분야는 ‘인테리어 바꾸기’이다. 우리는 6년 사는 동안 총 네 번 이사를 했는데, 그 중 세 번이 공교롭게도 3년 반을 산 교토에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원룸에서 두 번째 아파트로 이사한 이유는 그때만 해도 교토 생활이 이리 길어질 줄 몰랐기에, 살아보고픈 동네에서 남은 기간을 지내자는 취지였다. 둘 다 비와호라는 호숫가마을(시가현)을 좋아해서(이럴 때는 아주 찰떡호흡), 그 호수가 보이는 낡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둘이 살던 조그만 원룸에서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며 구조를 바꾸던 남편은 이 집에 본격적으로 애정을 쏟았다.

앤티크 테이블과 스툴, 팔걸이의자 등으로 공간을 꾸미고 싶다며 앤티크 숍에 구경 가자던 남편. 앤티크 가구가 비싼줄은 알았지만, 직접 체감하니 뒤통수가 띵했다. 그래도 남편 장래희망이 목수라는데, 이런 창작의 기회마저 빼앗으면 크산티페 취급을 받을까 싶어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대신 나는 나의 케이크 할당량을 잠시 동안 줄이기로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테리어가 취미가 아닌 나는 잘은 모르지만, 이들은 정기적으로 새로운 아이템과 변화를 필요로 한다.


교토생활의 첫 집. 이 좁은 원룸에서 저렇게 다양한 인테리어가 가능할지 몰랐다. 어느 날은 합판을 사와서 책상을 만들기까지...


갑자기 코끝 시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초겨울, 일본 생활의 낭만인 코타츠가 남편의 위시 리스트에 올라왔다. 바닥 난방을 하지 않는 일본에서 겨울을 나려면 전기세가 가장 적게 나가는, 에너지 효율 높은 난방기기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우리는 이사할 때 이미 가스스토브와 에어컨 겸 히터를 샀잖아.’


“아니, 좀 웃기잖아. 서양식 앤티크 원형 테이블 옆에 무슨 담요 덮인 코타츠야?

집이 너무 꽉 차서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코타츠와 유럽 앤티크 테이블의 공존. 과거, 우리 집 거실의 모습.


거의 무(無)에 가까운 인테리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가 남편의 인테리어를 이해하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또 마지막에 돈을 쓰게 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남편은 라이카 카메라를 사고, 어느 날엔 막 출시된 애플사의 신형 아이폰도 샀다(혼자 사기 민망했는지 필요 없다는 내게도 한사코 강요해 나도 삼).

여기가 끝인 줄 알았지? 아니지, 절대 아니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고급스럽고 비싼 앤티크 테이블들은 이제 우리 집에 없다. 남편이 취업이 되고 내가 대학원에 운 좋게 붙으면서 우리는 다시 교토 시내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이 집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입했던 가격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으로 되팔았다.

어찌나 부지런한지 사는 것도 빠르고 되파는 것도 순식간이다. 주기적으로 살림을 정리해 리사이클 숍에 물건을 내다파는 게 또 다른 취미이기도 해서, 미관을 해치는 물건은 즉각 퇴거 조치, 빈 공간이 생기면 어김없이 새 물건이 등장한다.

이 복잡다단한 변화 속에서 나 역시 내 물건 몇 개를 확보했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내 자그마한 책상과 이제는 한층 더 너저분해진 책장, 그리고 미관을 해쳐서 쫓겨난 내 구닥다리 미니오븐 대신 하사받은 디자인이 훌륭하고 기능이 간편한 발뮤다 오븐레인지. 경제관념이 다른 남편 덕에 살까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은 안 샀을 물건도 이렇게 쉽게 얻는구나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나날은 깊은 한숨이 공존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책상 정리를 잘 못하는 나. 여기는 마음대로 어지렵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뒤로 정말 대책 없이 쌓아두기 시작.


“하나를 사더라도 오래 쓸 수 있는 질 좋은 걸 사야지. 결국은 그게 남는 거고 이득 아니야?”라고 설득한 뒤 돈을 쓰고, “사길 잘했지?” 하던 남편에게 나는 요즘에 와서야 노골적으로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를 사더라도 오래 쓴다더니 겨우 1년 조금 넘게 쓰고 다 팔았잖아. 오빠는 그냥 물욕이 많은 것 같아.”


우리 사이에는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면서 더 끈끈해진 부분도 분명 있지만, 사는 날이 늘수록 서로의 좋은 점을 덮어놓고 평가 절하하는 나쁜 습관도 생겼다. 어리바리하고 매사가 느릿한 나의 행동을 귀엽게 봐주던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훈련원 조교 같은 눈초리로 나의 행동거지를 따져 묻고 다음 순서를 재촉한다. 남편이 남자친구일 때, 손수 꾸몄다던 낡은 한옥집 자취방의 인테리어를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남편이 뭐 산다고만 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허세남으로 몰아세운다.

가끔은 그랬던 날들과 지금을 일일이 비교하며 사랑이 뭐고, 연애랑 결혼은 또 뭔가,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혼자서 축 처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철학가 에리히 프롬이 내린 사랑의 정의를 믿고 있다. 연애 감정을 뛰어넘는 사랑의 본질, 스파크 단계를 지나면 서로 약속처럼 지켜가야 하는 그 관계를 오랫동안 붙들고 가면서 마음을 지켜보고 싶다. 나와 상대의 변화, 감정의 무르익음, 익숙한 편안함 같은 것들을 기대하며. 결론은 으르렁 싸워대는 부부만큼 믿지 말아야 할 족속들이 또 없다는 것이다. 싸움은 순간이고, 악다구니를 무는 와중에도 그들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대감이 쌓이고 있다. 역시 결혼의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는 게 좋겠다.


결혼 전, 낡은 한옥집에서 자취했던 남편. 혼자 사는 남자의 집도 깨끗하고 향기로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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