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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햇님 Sep 11. 2019

대단한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그의 사전에 포기는 없는 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허구이긴 해도 삶의 파편을 모은 것이기에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스트레스받을 때는 희극적인 문체의 가짜인 듯 진짜 같은 남의 이야기를 읽으며 키득키득 웃으면 어느 정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에는 팍팍한 현실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생긴달까?

이번에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으며 1cm쯤 대범해졌다.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가진 인간 본연의 호기심과 도전, 그에 따른 실패담, 제법 긴 불행 속에 이따금 찾아드는 행복이나 평화,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굴레 같은 것들을 쫓으며 왠지 모르게 속이 후련해졌다. 급기야 채용 사이트 살피며 눈이 충혈된 남편에게 “기죽지 마! 인생 4년 좀 허비했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 이런 건 허비라고 할 수도 없지!” 하며 박력 있게 말했다.




보통 힘들 때 남자들은 동굴로 들어간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내가 그렇다. 나는 눈앞에 해야 할 일이 그득그득할 때 모퉁이에 몸을 숨기는 유형의 사람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오늘 안 한 숙제는 내일 내 발목을 잡을 것이다’ 주문을 외우며 눈을 똑바로 뜨려 애쓰지만, 마쳐야 할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쭉 써내려간 뒤로도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아 곤란한 게 나란 인간이다.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의 이 도망가고픈 마음이 극에 달했다. 할 일이 이다지도 많다니. 게다가 아기까지 감기에 걸려 내게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 주 귀국 실화냐?


남편은 나와 달리 데드라인이 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다. 남은 기간과 해야 할 일을 시간, 요일별로 분배하고, 예정한 일을 그날 마치지 않으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스타일. 이럴 때 남편과 나 사이에는 냉랭한 기운이 흐른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움직여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나는 희희낙락 책이나 읽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쓰레기까지 다 가지고 한국 갈래? 최소한 버릴 거라도 미리 정리하란 말이야.”

“아, 알았어! 누가 안 하겠데? 지민이 어린이집 가면 속도 내서 할 거라고!”


며칠째 잔소리를 늘어놓던 신랑은 오늘부터 전략을 바꾸었다. 아기와 놀아주고 있는 내 옆에서(우리 아기는 39도 이상 열이 나도 놀아달라며 웃음을 날리는데, 단, 내게 안긴 채 놀아야 한다) 혼자 정리를 시작했다.


자연 애호가. 성격은 조급한데 낭만은 나보다 잘 즐긴다.


“반짝아, 여기, 책상 있잖아. 버릴 것만 좀 구분해줘.”


난 또 이렇게 나긋나긋, 친절하게 말해주면 기분이 좋아서 고래가 춤을 추듯 움직인다. 대학 시절, 기말고사를 목전에 두고 10권짜리 《태백산맥》을 빌려 읽고 있던 나는, “반짝아, 너 자리 맡아뒀어. 도서관으로 와~”라는 친구의 문자를 받고는, 그날로 공부를 시작했고(물론 거의 벼락치기에 가까워서 점수는 좋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말로 따귀 때리는 실력이 탁월한 편집장 밑에서도, 어르고 달래주는 아군 한 명(디자이너 선배) 덕에 회사 생활을 버텼다. 친절에 약한 사람, 나야 나!


그렇게 나는 오전을 청소로 불태웠다. 구분만 해달라고 했을 뿐인데, 마스크까지 쓰고 책상과 책장을 완벽하게 치웠다. 그대로 상자에 담기만 하면 끝! 그것 말고도 남편이 거의 1년 전에 부탁한 대형 쓰레기 접수(일본은 부피가 큰 가구나 가전 등을 버릴 때 이를 미리 거주하는 시에 신고하고, 얼마짜리 스티커를 붙여 언제, 어디에 버릴 건지 등을 사전에 예약한다)와, 국민연금 탈퇴 문의까지. 다 해놓고 기분 좋게 셋이서 점심도 먹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내 책상 앞에 서류함과 상자 몇 개가 또 놓여있다.


“이게 뭐야?”

“그것도 오늘까지 정리해~.”


아, 내가 또 속았구나. 저렇게 벌려두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청소를 시작하게 될 터였다. 나는 서랍에 깊숙이 넣어둔 물건은 꺼내보지 않으니 청소할 필요를 못 느끼지만, 어수선한 무언가가 발에 치이거나 발바닥에 먼지 달라붙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필사적으로 청소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잠시 남편과 아기가 낮잠을 즐기고 있어 글을 쓰고 있지만, 아마도 오늘 밤, 나는 저 상자들을 정리할 것 같다.




‘디테일’에 집착하는 우리 집 남자는 자기 생각대로 판이 돌아가지 않으면 여러 번 계획을 수정하며 치밀하게 대안을 마련한다. 스쳐간 인연 중에도 알게 모르게 목적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있었을 테지만, 어쩐지 그런 사람들과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저토록 노력하는 사람이라니. 그게 나와 다른 부분이라서 멋져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웃을 뿐이다.


카페인과 당 충전하러 나가자고 한 건 나였다. 놀멍쉬멍이 인생 최대 목표인 나. 아들아, 넌 누굴 닮을래?


생각해 보면 남편은 연애와 결혼,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한결같은 집념을 보여주고 있다. 남편과 본격적으로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꽤 오랫동안 문자만 주고받았다. 직장 선배가 고구마 씹는 기분이라며 나를 대신해 남편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우리의 오프라인 만남이 시작됐다. 문자만 주고받을 때는 나처럼 소극적인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한 번, 두 번 만나고서는 돌연 적극적인 상대가 됐다. 어떤 사람인지 좀 지켜보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일주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입만 열면 ‘사귀자’는 얘길 해대는 통에 어찌어찌 연인이 되었다.

결혼 얘기는 사귄 지 한 달쯤 됐을 때 나왔다. 나는 구닥다리 같은 사람이라서 그래도 한 해는 같이 지내봐야지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고 딱 잘랐다. 그럼에도 몇 달 뒤, 고향 집으로 추석 선물이 날아오며 자연스럽게 애인 있음이 밝혀졌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는 부모님께 인사만 드린다며 이 남자가 찾아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상견례 날짜가 잡혔다. 두 명의 보헤미안(내 아버지와 남편)은 의견이 잘 맞았다.


“아버님과 상의해서 상견례 날짜 잡으세. 자네가 진짜 우리 얼굴만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닌가?”

“네, 맞습니다, 장인어른. 제가 2월 이내로 날짜를 잡아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만난 지 1년 만에 유부녀가 되었다. 주변 친구들도, 회사 동료들도 내 걱정을 참 많이 했다. 만나고 얼마 안 되어 결혼하는 사람들이야 주위에 쌔고 쌨지만, 그게 내가 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결혼 이후로도 매일같이 내게 기획안을 올리듯, 새로운 인생 제안을 하는 남편 덕에 나는 지쳐버렸다. 남편이 들이미는 제안에는 무조건 ‘동의’, ‘이하 동문’이라고 서명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책 읽으며 주변을 환기할 여유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 신경쇠약증에 걸렸을 것이다.




포기를 모르는 남편, 그의 철저한 계획대로 내가 착착 움직여줬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는 남편에게 얄미움을 느낀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저이는 내 마음을 영영 모르겠구나 싶어 약이 오르면, 일부러 조금은 형편없거나 무모해서 치를 떨게 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책을 골라 읽는다. 《백 년 동안의 고독》도 그렇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고전들은 나를 다시금 현실 앞에 긍정 가득한 사람으로 서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 뭐랄까, ‘내 인생의 모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나 봐’ 같은 생각이 들면서, ‘이 정도면 내 인생, 괜찮네!’ 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번 국제이사 사건은 내생에 너무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걸 또 하면 나는 내가 아니다.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없어야겠어.’ 그동안 나 혼자서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며 행정상의 문제를 매듭지었기 때문일까, 그러는 동안 내 멘탈은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동상이몽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남편은 또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5년에서 8년 정도 회사 다니고, 다시 재정비(여기서 말하는 ‘재정비’란 또 다른 해외 거주 계획을 의미한다)해보자고.”

“뭔 소리야~! 이제 그만 한국에 뼈를 묻어!”


재정비는, 누굴 위한 재정비인지. 짐을 싸는 틈틈이 ‘한국 돌아가면 몇 ℓ짜리 냉장고를 살지, 세탁기는 어떤 모델이 좋을지, 이제는 건조기나 공기청정기도 필수라는데’ 등등 끊임없이 말을 거는 남편. 벌써 한 살림 거하게 차릴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또 그 모든 걸 접고 떠날 생각을 하다니. 한편으로 나란 여자, 참 대단한 남편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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