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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햇님 Sep 19. 2019

운명공동체라는 아픈 말

아내이자 엄마이지만 '나'이기도 한 삶

이십 대 초반, 나는 우울을 먹고 자랐다. 대학 진학으로 지방에서 올라와 막 서울살이를 시작한 얼뜨기. 나는 서울의 모든 것이 놀라웠고,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또박또박한 말투를 듣고 있으면 괜히 진땀이 났다. 서울은 이십 년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문화로 가득해서 한동안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보였고, 그 갈증이 모이고 모여서 우울이 되었다.

작은 창을 열면 몇 뼘 차이로 옆집 붉은 벽돌이 닿던 고시원이 방이었던 적도 있고, 사별 후 항암치료를 하느라 날카로움과 예민함만 남은 어느 아주머니의 아파트에 얹혀사는 하숙생이었던 적도 있다. 세탁기 사용을 못하게 하고, 남은 반찬을 다 섞어서 국을 끓여주던 하숙집에서는 이미 도망을 나온 뒤였다. 신경질적이었던 아주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는 나를 비롯한 네 명의 하숙생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나는 사회 부조리를 정의로운 눈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돈 몇 푼으로 태도가 달라지는 어른들의 간사함을 먼저 경험했다. 누구에게나 출발이 같을 수는 없다는 세상의 이치를 날로 깨달으며 의기소침해졌다. 진짜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름답지 않은 어른들의 세계를 끝도 없이 목격하면서 작고 볼품없던 나의 세계는 조금씩 허물어졌다. 학교 안에는 마음 나눌 친구가 없었고, 학교 밖은 내게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나는 어두웠고, 현실을 푸념했다. 내 무거움 때문이었는지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싶었던 사람마저 잃게 됐다. 마음이 건강하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것조차 놓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면서 내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무엇보다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세상이니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보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놓쳤다고 생각했던 첫사랑과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좋았던 기억마저 망치는 연애를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우울은 냉소로 바뀌었다. 스물여섯 여름, 자신을 더는 기다리지 말라는 그 애의 말을 듣고, 나 역시 미련스러운 이 만남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점점 일에 몰두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 적도 있지만, 관계가 깊어질라치면 상대의 친절과 관심에 불편함을 느꼈다. 혼자가 편했고, 진지함보다는 가벼운 게 좋았다.

스물아홉. 남편이 내게 막 다가오던 시절에는 모든 게 더없이 좋은 상태였다. 보증금을 두둑이 얹은 월세방이 있었고, 취미와 일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연애가 없어도 내 인생에 아무 문제가 없는 무결점의 나날이었다.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인 게 좋았다. 혼자서 극장에 가는 것도, 혼자서 카페에 들러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해 맛을 음미하며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도, 주말에 몰아둔 청소와 빨래를 한 뒤 추레한 몰골로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것조차 ‘나답다’고 느껴졌다.

연애 시절과 신혼 초만 해도 혼자이고 싶은 이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종종 혼자 영화를 봤고, 결혼 후에는 단둘로 가득 차는 시간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약속을 잡거나 야근을 했다. 남편은 나처럼 삐뚤어진 사람이 아니라 그랬는지, 나로 인한 섭섭함을 솔직하게 그리고 기분 나쁘지 않게 잘 표현했다. 나라면 아니꼬워 입을 닫았을 얘기도 먼저 꺼내 줬고, 지금은 그 노력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 나의 나다움이 유일한 자부심이었던 내가 그렇게 서서히, 남편에게 마음을 열었다. 6년이 흐른 지금, 남편과 나는 부부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 아웅다웅한다.


그릇과 음반, 책을 야금야금 사는 게 나름 취미였다. 일본 오기 전에 거의 다 팔았는데, 이따금 생각 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둘에서 셋이 되고 보니 혼자일 때의 안락함을 다시 그리워하는 내가 보인다. 내 신경이 남편과 아이에게 몰려서 그 좋아하던 취미가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낄 때, 고요하게 쉬고 싶은데 아기가 빽빽 소리를 질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때, 남편 퇴근 시간만 기다리며 하루를 버티고 있음을 깨달을 때… 톡 쏘는 맛조차 없는 맹숭맹숭한 술처럼 텅 빈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은 허전함이 몰려온다.


‘내가 잘살고 있는 건가?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기가 백일이 갓 지났을 무렵, 남편이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들를 곳이 있다고 연락을 준 적이 있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늦게 귀가한 남편을 붙잡고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게 기억이 난다. 남편은 누가 들으면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온 줄 알겠다며 성을 냈고, 한 시간 동안 부리나케 일을 처리하고 온 남편은 그의 말을 증명하듯 땀범벅이었다.


“오빠는 그래도 바람 스치는 것도 느끼고 하늘이라도 보잖아! 난 그렇게라도 걷고 싶다고!”


나는 엉엉 울었다. 내게 이제 아기라는 혹이 붙어 있어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절망하며 울었다. 절망을 품었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미안해서 또 한참을 울었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여러 날이 지나면서 아이는 18개월이 되었고, 나는 나대로 ‘엄마’라는 위치의 책임을 늘 기억하려 노력한다. 운명을 함께 개척해나갈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고민한다. 읽고 쓰는 삶을 지향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바라봄과 동시에 나다움을 만끽할 접점을 찾고자 함이다.

혼자일 때는 혼자인 게 좋으면서도 실은 조직의 소속감을 좋아했었다. 내가 속해 있는 어떤 사회적 울타리 덕분에 감히 혼자여도 즐겁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편집자라는 직업이 그렇더라. 혼자 책임지는 영역이 있으면서도 결국은 공동 작업이라서, 한 권의 책을 마무리했을 때 구성원이 다 같이 느끼는 성취감이 있다. 고독하지 않았던 그 시절, 어쩌면 나는 일과 연애를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넘어서 인지, 아니면 결혼을 해서 인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바빠져서 이려나? 어쨌든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그 시절의 우울과 냉소는 거의 사라졌다. 그래도 나를 돌아볼 틈이 없다는 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진지하게 생각하다 보면 어릴 적 여러 번 보았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떠오른다. 짤막한 장면, 장면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채플린은 목적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잘되는 일이 없고 실수만 연발한다. 가끔은 그 톱니바퀴에 눌려 납작해지는 게 마치 내 일인 것처럼 생생하다.  

시계탑 너머로 거대한 톱니바퀴 여러 개가 맞물려 돌아가는 동안, 나도 채플린처럼 바쁘고 분주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1초에 한 걸음씩, 60초에 육십 걸음을 걷는 기분으로 다녔다. 집에서 어린이집으로, 어린이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동네 마트로, 마트에서 어린이집으로, 어린이집에서 다시 집으로. 남편이 한 시간쯤 늦게 귀가한 그날, 어떤 마음으로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었다.

챙겨야 할 게 너무 많을 때는 오히려 과거의 나를 그리워할 수조차 없다. 내가 나다움에 격하게 목이 말랐던 순간은 어이없게도 8월 여름휴가 때였다. 남편의 회사는 열흘간 쉬었고, 나는 기말고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여름방학을 맞이했었다. 제법 긴 휴가를 셋이서 어떻게 보낼지 부푼 고민도 해봤지만, 휴일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혼자였던 나를 그리워하기 바빴다. 세 가족의 끼니 걱정은 방학도 휴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날, 밥 짓느라 힘겨워 보였는지 남편의 제안으로 셋이서 짧게 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사고뭉치 아들 녀석 뒤꽁무니만 쫓다가 금세 피로해졌다.

남편은 내 눈치만 살피다가 허둥지둥 나를 카페로 데려갔다. 가토 쇼콜라와 커피를 주문하고, 내가 그것들을 먹는 동안 아이를 봐줬다(남편은 내가 케이크만 먹으면 다 괜찮아지는 줄 안다). ‘하아, 이 케이크와 커피 한 잔으로 나는 또 기분을 풀어야겠지? 내가 생각하던 휴가는 이런 게 아닌데.’


가토 쇼콜라. 좋아하는 맛인 건 분명하지만, 이걸로 다 채워지지 않는 기분도 있다.


내 운명공동체는 이제 ‘가족’이지만, 그걸로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족이란, 일하는 사이보다 맺고 끊음이 더 애매해서 아무리 힘에 부쳐도, “이건 제 일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집안의 모든 일은 내 일이자 남편의 일인 셈이다. 그래서 ‘더는 못 한다’고 말해도 내가 거부한 일을 이어받아줄 주자가 없다. 그것이 양육이든, 살림이든, 가정 경제든 매한가지다. 서로의 상태를 그때그때 체크하며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에 능동적이 되어야 그나마 집안이 우습지 않게 굴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과거의 그날처럼 내가 가고 싶은 장소에 가서, 홀로 조용히, 늑장 부리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아침은 건너뛸 예정이다. 미리 알아본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예전의 나처럼 30분 넘게 음식을 꼭꼭 씹으며 천천히 식사를 하려고 한다. 바닷길이나 숲길을 걷기도 하고, 동네의 작은 책방에 들러 종이책 냄새를 킁킁 맡으며 읽고 싶은 책도 한 권 살 것이다. 밤에는 언제나처럼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엽서에 내 근황을 써 내려간다. 여행이 끝나는 그 길, 빨간 우체통에 엽서를 집어넣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는 가족들에게 더 잘 웃어주는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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