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잡고 있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나에게 있어 김연수는 '나이가 든다는 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변한 자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였다.'라고 말하는『스무살』의 작가다. 그리고 그 어느 다른 작가의 작품보다도 더 서정적이고 독자들의 감성을 잘 터치하는 소설제목-사랑이라니, 선영아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같은-을 쓴 작가다.
마찬가지로 제목은 너무나 서정적인 이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나에게 큰 자괴감을 줬다. 가을이라 감성이 폭발할 그런 섬섬옥수같은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이건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건가 하는 멀미만을 안겨줬다. 명백한 제목의 배신이다. 아니다, 외롭다는 건 맞다. 그런데 너무 치열하게 외로워 문제다. 너무 외로워서 머리가 다 아플지경이다. 어느 한 부분 순탄치 않는 소설 속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외로움과 필연적인 연결고리는 시대가 주는 강박관념과도 같다.
어떤 냉소도, 환멸도, 절망도 없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미래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지하고 헌신적이고 이타적이었다. 그게 바로 그 시대의 분위기였다. (p.237)
이길용이 강시우가 되어 가는 과정보다 '나'와 정민의 이야기에서 더 생각할 점이 많았다. 비밀도 몰래도 아닌 그런 연애에 -원래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다고 더 재밌다며- 그 끊임 없는 대화들이 좋았다. 김치찌개 먹을래 경양식 먹을래 같은 생활의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가장 강력한 임팩트 있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말이다.
정민은 어둠 속에 누워 방해전파를 들으며 더없이 광활한 우주를 생각했고, 자신이 그렇게 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외로웠으므로. 정민은 밤하늘을 떠다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누군가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과거나 현재나 미래 그 어디에 있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꼭 같이 라디오를 듣겠노라고. (p.86)
후에 등장인물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의 아는 사람들까지 실타래같이 얽혀있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지만, 이 소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바가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기를, 혹은 자신도 누군가의 이름을 외질 수 있기를 소망하'던 '나'도,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은 그들뿐'이어서 자신을 집요하게 고문했던 사람들의 손을 잡은 이길용도,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다 외로워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무주에서 보내던 그 해 겨울이 기억나.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그 때 달달달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은 누군가 나게 말을 거는 일이었어. 그게 누구든, 나는 연결되고 싶었어. 우주가 무한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뭐래도 상관없어. 다만 내게 말을 걸고 또 내가 누구인지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우주에 한 명 저도는 더 있었으면 좋겠어. 그게 우주가 무한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무한한 우주에서 살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너무 추울 것 같아. (p.68)
그래도 이 소설은 문학평론가 황종연의 말처럼 이야기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출몰한 다양한 인물들의 열정과 허영, 진실과 허위, 광기와 치기가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는 시공간 동안에도 행복을 놓지 않는다. 처절하게 '새로운 시대의 파도에 본의아니게 휩쓸린 조개껍질 같은' 삶 일지라도 과거와 미래에 걸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으로, 선명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가느다란 실선으로 이미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준다. 의미없는 관계는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까지 읽어내니,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에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비록 소설 텍스트에서의 의미와는 조금은 다르지만, 관계에 있어서 이 말을 실천을 해볼까 한다. 그리고 내가 내가 되어 맺은 관계를 외롭지 않게 꽉 잡아 볼까 한다. 나는 행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