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i Mar 22. 2017

잡문집, 무라카미하루키 (2011)

무형식이 형식인 잡문

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 뭐냐하면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뭐 별 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어렸을 때, 예능 '놀러와'를 보고 있는데 그 날 게스트 중 한 명이 장기하였다. 기억 나는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는 이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였는데, 어느 날은 사람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집으로 들어가선 어머니와 대화를 하는데 장기하 어머니가 그러셨단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을 제일 크게 화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별 일 없이 산다'고 말해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영감을 받아 이 노래를 만들었단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뮤지션들은 곡을 쓰려면 뭔가 석연찮은 개운치 않은 불편한 감정들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행복하고 평온해서 곡이 써지지 않으면 불안해 진다고. 그래서 약간의 불행한 감정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는 배 부른 소리였다.   


볕만 좋아도 싱숭생숭해 하는 내가 요즘 정말 별 일 없이 산다. 매일을 조잘거릴 수 있는 짝꿍도 있고, 사회초년생때 만큼 억장이 무너지는 엄청난 일도 없고, 자주 보지는 못해도 한 마디만 해도 열 두마디 응수를 해주는 친구들도 여전하다.


그래서 그동안 눈길이 가지 않았던 편하고 담담한 내용과 형식의 책에 손이 갔다.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몇 문장들때문에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이었다.



좋은 날이 많길
가오리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늘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좋을 때는 아주 좋다)


이 글은 작정하고 짧게 쓴 결혼식 주례사라는데 왜 하필이면 도대체 왜 때문에 뙇! 하고 저 구절이 처음으로 읽혔을까. 좋을 때는 아주 좋다니. 그리고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요 저도 제 앞 날에 좋을 때가 많기를, 웃음이 가득하고 여유가 만연한 그런 행복한 날이 많기를 기대해요. 미래를 몰라서 지금은 이렇게 불안해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거겠지요. 아 가슴 속에 탁하고 꽂혀버린 이 문장처럼 정말 좋을 때가 많기를.


아날로그의 미학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든 이 세계에는 책이라는 형태로밖에 전할 수 없는 생각과 정보가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활자로 된 이야기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움직임과 떨림이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중략) '꾸준히 써나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지금 무엇보다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곁가지가 거세게 흔들려도 근본의 확고함에 대한 믿음이 지금껏 나를 지탱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곁가지가 거세게 흔들려도)


한 때는 전화보다는 문자를 선호했던 때가 있었다. 친하면 친한대로 어색하기도 하고, 거리감이 있으면 거리감이 있는대로 내가 긴장해서 횡설수설하지 않을까 겁나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카톡보다는 전화가 좋다. (업무는 카톡이나 메신저가 좋다. 너무 많은 내용이 오고가서 기억이 안난다. 별로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지만. 하하) 기다리지 못하는 7년차의 아재감성일 수도 있지만, 전화를 하다보면 이렇게 활자화시키기에는 너무나 막연한 어떤 물렁이는 느낌이 있다. 말그대로 커뮤니케이션,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화할 때 상대방은 모르겠지만 나만 캐치할 수 있는 자그마한 웃음소리나 잠깐의 공백을 듣는게 의외로 마음이 놓인다. 의미없는 시시껄렁한 내용일지라도 통화 후의 그 훈기돋는 긴 여운은 분명 매력적이다.


매체가 주는 고유한 느낌이 있는 건 책뿐 아니라 라디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라디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나오면 마치 계라도 탄 듯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면 너와 나의 소통이라는 건 참 불현듯 오는, 우연의 운명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읽던 안 읽던 책을 사 모으고, 여행을 가면 엽서를 쓰고, 편지를 쓰고, 주말 아침이면 밀린 라디오를 듣는 나는 이 시대 넘버원 아날로그 소녀. (최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다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훈훈함을 원한다면 나부터 마음을 훈훈히 뎁혀 봐야겠다 생각하는 요즘이다. 무서워서 움츠리고, 냉동으로 얼리다가는 정말 필요할 땐 해동때문에 때를 놓치곤 영원히 아쉬움으로 남게 될 것이기에. 사실 요즘 불안하기도 하다. 왜 이렇게 잔잔한 것인가 생각하다보면 지금을 누리지 못할 것 같아 살짝 외면하고 있기도 하지만, 뭐 다시 파도가 일면 또 온 몸으로 잘 맞으면 된다. 난 또 그만큼 성장하고 파도를 품은 넓은 사람이 되겠지. 그래도, 이 평온함이 끝이 아닌 시작이길. 아니, 끝없는 시작이길.

매거진의 이전글 토닥토닥, 김재진 (20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