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안개 속 노르웨이의 숲
이 책을 두번째 읽는다. 아니다, 상실의 시대를 한 번, 노르웨이이 숲을 한 번 읽었다고 하는게 맞는것 같다. 상실의 시대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성적인 부분이 많아서 '이렇게 야한 책이 왜 유명한건가'라고 생각했더랬다. 게다가 제목부터 상실의 시대라고 하니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가에 집중했는데 공통적으로는 삶에 대한 의욕과 긍정성을 잃었으나 성적 호기심과 섹슈얼한 관계는 분출되고 있어 읽는 내내 불편했던터라 내 머릿속엔 항상 퀘스쳔마크로 남아 있던 책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때로 나는 정말 슬퍼져.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치 깊은 숲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춥고 외롭고, 그리고 캄캄한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아.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으면 레이코 씨는 절대로 이곡을 연주하지 않아." 나오코가 말했다. (p.192)
확실히 노르웨이의 숲은 이전과의 관점과는 다르다. 이전이 '상실'이었으면 지금의 키워드는 '고독'이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희망의 면도 슬쩍 보이지만 여전히 인물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부유한다. 기츠키도, 와타나베도, 나오코도, 나가사와도, 하쓰미도, 미도리도, 레이코도 모두가 이해 받을 수 있으면서도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추측하기도 해가며 이해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불편하다.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혼자 고독하고 황량해하며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남겨진 사람은 죽은 사람의 분신이 된 듯 서로를 안는다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 불필요하다 싶은 빈도 수와 묘사 게다가 다소 비도덕적인 면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된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하루키는 성적인 관계를 사람의 치유과정의 하나, 극복의 표현수단으로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도리와 나가사와다. 아주 사소하고 쓸데 없는데서 사랑은 시작된다고 말하는, 끝까지 튕기고 싶어하지만 보고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미도리는 분명히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지만 그럼에도 시선이 머무는 건 나가사와다. 책임이 없는 자유분방함을 느끼고, 아주 놀랄 만큼 솔직하며, 얻기 위해 잃음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이 선배는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으로 그 시절의 청춘을 낭만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와타나베에 한 마지막 말까지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텅 비어도 괜찮아
텅 비어도 되도, 때로는 늦어도 된다. 텅 비어버려 고독해 하고 헛헛해 하며 먹먹해 하는 이 소설을 통해 아이러니하게 이것을 배웠다. 사회의 리듬과 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열정과 즐거움같은 걸로 꽉 차 있지 않다고 해서 내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아도 된다.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된다. 비워져야 잘 채워질 수도, 늦은만큼 내가 찾은 내 방향으로 갈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