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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Feb 28. 2018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1986)

성공적인 일상 속 해피엔드

설 연휴 바로 전날 연차를 (반강제로) 냈다. 나는 휴일에도 7시에는 눈이 떠지는 아침형인간(이 아니라 출근형 인간일지도)이라 오후반차만으로도 충분한데 연차라니. 왠지 시간을 밑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남들이 다 일하는 날에 해야 제 맛인 카페서식을 위해 이것저것 챙기다가, 문득 오늘은 읽을 수 있겠다 싶어 별 생각 없이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상하리만큼 아무것도 안 읽히던 2월에 실로 오랜만에 택한 소설이 아닌 책이었다.



고백하자면 하루키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이 책을 읽으면서 '아 하루키랑 친해져보려 했는데, 멀어지겠구나' 했다. 잔잔한 미소를 짓는 소소한 이야기에서 부터 다소 황당했던 판타지, 아리송했던 이야기와 더불어 부담스럽지 않은 일상적 그림으로 가득한 이 책은 소설가가 산문집을 내기 뭣해서, 화가가 일러스트집을 내기 뭣해서 만든 '화가와 작가의 해피엔드'였다.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정말로 내 마음에 든 것은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중략)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이 나를 축복했다. (중략) 때론 인생이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주는 따스함의 문제,라고 리처드 브로티건은 어느 작품에 썼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든다. (p.39)


사실 내가 카페에 가면, 심지어 카페가 많은 곳을 여행 장소로 정하는 것을 보면 내 친구들은 '야 너 술집으로 가야지 카페가면 안된다' 부터 '남자들이 네 취향을 맞추기 힘들거다'까지 별 소리를 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카페마다의 그 분위기가 좋아'라는 이야기로 일관하긴 했는데, 이 챕터를 읽으면서 확신했다. 나는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제법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 구나. 그래서 좋아하는구나. 느긋하게 카페에 자리 잡아 책도 읽고, 사람 구경도 하고, 메모도 끄적이다가, 여행계획이나 구매계획도 세워보고 잘 노는 그런 내가 혼자서는 움츠러들어 잘 못했던 어린이가 아닌 내 모습이 좋다.


그나저나 16살 때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즐겼다니, 이 부부은 아주 낭만적으로 자의적 각색이 된 부분은 아닌가 싶다. 에이 설마.




셰이빙 크림 이야기


외국에 나가면 제일 먼저 그 지역 슈퍼마켓에 뛰어들어가 셰이빙 크림을 산다. 그리고 그것을 호텔의 욕실 선반에 면도기와 칫솔과 함께 나란히 늘어놓는다. 그러면 그때야 '아아, 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p.179)


직장인 6년차 때 떠난 3주간의 유럽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챙겨놓은 휴대용 치약. 여행 첫 날, 혀가 얼얼할 정도로 너무 매운 녀석이라 '악'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왔음'을 여실히 증명해 줬던 그 녀석. 행복했다. 밖을 나서자 마자 보이는 마트에 들어가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보통스러워 보이는 치약을 하나 사서 하루 내 같이 돌아다녔던-가방에서 굴러다녔다는 소리다- 기억이 난다. 그 때도 행복했다. 아마 그 때 부터였던 것 같다. 여행지에서 제일 먼저 사는 것이 치약이 된 것은. 하루키에게 셰이빙 크림이라면, 나에게는 치약이 있다.



해피엔드를 위해서


무엇이 우리를 해피엔드로 이끄는 것일까, 해피엔드의 전제조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상 속에서 찾는 만족감이 모여 해피엔드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이 에세이 속 소재들은 특별하지 않다. 우리의 일상도 이렇게 넓은 이야기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처럼 명랑하고 활기차길 바란다. 커피를 마시면서, 책장을 넘기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망상도 해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옆자리의 누군가를 있기를 -그 사람 역시 이런 따뜻한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짜 해피엔딩은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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