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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Apr 15. 2018

소년이 온다, 한강 (2014)

그 날 그 곳의 소년이 온다

일주일에 두 권도 읽던 시기가 있었는데 근 한 달은 단 몇 문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일종의 독서 침체기였다. 봄이라 그런줄 알았는데, 봄꽃들이 이제야 하나 둘 개화하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이, 아무튼 슬럼프였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 책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서서가야하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 시간에 그렇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오히려 나는 그 때, 그렇게 읽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답해주었다.



덜컹이는 지하철에서 첫 두 장을 읽기 전까지 '그 날'의 '그 곳'이 이 책의 배경인지 몰랐다. 아 나 또 한강 책 못 읽는건가. 사실, 한강의 소설은 언제나 나에게는 난공불락이었다. 맨부커 수상했던 채식주의자도, 주인공이 흥미로워 시작했던 희랍어시간도 마지막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머릿속에 선뜻 그려지지 않아서일까, 너무 잘 그려져 움찔해서일까 아무튼 못 읽었다. 그 때 책 뒷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소재는 그것을 택하는 일 자체가 작가 자신의 표현 역량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일 수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그러할 뿐 아니라 가장 그러한 소재다. (중략)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중략)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고 의심할 사람들에게,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이것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  


읽자.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소재지만, 이번엔 읽어보자.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을 소설로 마주할 요량이라면 그건 반드시 한강이어야만 한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을 '좋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인상적이었다는 말, 생생했다는 말조차도 이 상황에 어울리는 것인지에 대한 백번의 의문이 들었다. 어느 부분이 팩트이고, 어느 부분이 픽션인지를 모를 지경이라 그저 모든 상황 하나하나가 기막히고 안타깝고, 그리고 아프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중략)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p.135)


가족들과 밥 먹게 저녁에 늦지 않게 돌아오라는 엄마를 보내고 중학생 동호는 그 날의 그 곳에 남는다. 그 곳에서 함께 있던 은숙/진수/선주는 살아 남아있음을 치욕으로 느끼며, 과거 기억에 대한 고통으로 여기며 현재를 견딘다. 그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신뢰, 내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것이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분수대를 가득 매워 줄 줄 알았던 수십만의 시민들이 불도 켜지 않은채 숨죽여 자신의 집에서도 깊숙히 숨어버렸음을 목도했을 때, 양심의 보석인 줄 알았던 내가 허기를 참지 못하는 하나의 살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강한 의문이, 그리고 그 고통들을 기억하고 왜 하필 살아나버렸는지에 대한 자상이 끈덕진 고름처럼 새어 나올테니 말이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게 고통스럽다.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같은 깜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이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잇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 (p.121)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 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p.122)


꽃이 핀 쪽으로


막내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렇게 마음 쓰리고 먹먹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그 때 내가 네 손을 잡아 끌고서라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네 형마저도 잃을까 싶어 발길을 돌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여섯살적 천변길에서 내 손을 이끌고 '꽃 핀 쪽으로'으로 가자고 이끌던 모습이 선한데라는 어머니의 말에 울지 않을 사람이 하나 있을까.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한창 읽을 때 제주 4•3대한 기사나 프로그램도 많았는데, 그동안 나의 하루하루에 급급해 관심 하나 주지 않았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다. 나는 게을리 했으면 남에게만 교육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같아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는 어떤 ‘인간’일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외면하지 않는 인간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일정의 답을 찾을 때까지 아마도 나는 다시는 모나미볼펜을 쥘 수 없을 것 같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하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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