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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Jun 14. 2018

문학을 놓을 수 없는 이유

June 2018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뭘까?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출근길에 2분마다 sns를 새로고침을 해대는 내 모습이 어쩐지 흉해보여 가방에 책을 넣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이왕이면 재테크, 이왕이면 기술서면 좋겠지만, 시집 혹은 문학책이라니 시대를 역행하는, 아니면 시대의 근원을 갈구하는 문학도일수도 있겠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 문학을 고집한다. 허구라 할지라도 찬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생각없이 통으로 읽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서사가 궁금하다. 그 와중에 내가 차마 내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정확하게 표현된 문장, 문단들이 느닷없이 읽힐 때면 아주 깊은 공감을 지나 진한 위로를 얻는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 위로다!) 나만 이렇게 사는게 아니다라는. 이를테면 김애란 작가의 말마따라 삶이라는 구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왜 대부분의 문학은 인간의 슬픈 감정을 자극하는 걸까?


혹자들은 좋고 기쁜 감정을 공유하기엔 인간이라면 감추고 싶은 -박탈감이랄지, 질투같은- 것을 건들여 의도치 않은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약한 감정을 건들이는게 아니겠냐고 한다. (이타심을 가장한 이기심을 깨닫는, 미묘한 우월감을 갖는 내 자신을 목도했을 때의 느낌도 그리 유쾌하진 않겠지만)


나는 그것이 공감의 기준 차이가 아닐까 싶다. 사람의 감정이 양가와 음가로 나뉜다고 하면, 좋고 밝고 긍정적인 양의 감정 기준은 매우 주관적이기에 공감의 폭이 적지만, 다소 우울하고 외로운 음의 감정은 비교적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 공감 및 몰입을 배가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아이라인이 잘 그려지면, 머리 컬이 잘 살면 괜시리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아 좋지만, 이 기분에 동의는 되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반면에, 누군가와의 결별, 관계의 몰락, 퇴근 후 집에 가는 길 등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이라면 벌써부터 충분한 공감을 받는다. 딱히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닌데도 먼저 마음이 가고,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우리는 썩 괜찮은 청자가 되는 듯한 근사함이 느껴진다. 우리는 모두 표현의 결핍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누군가 나보고 시간이 남아서 갖는 신선놀음이라고, 피터팬적 낭만을 꿈꾸는 아날로그라고 하더라고 문학이 내 삶에 게으르지만 꾸준하게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거창하지 않고, 비슷한 감정들을 공유하는 보통의 존재임을 확인 받게 하고, 깊은 이해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은 문학이 더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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