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로운 줄 모르는 김약국의 딸들
이름 주는 압도감을 이야기 한다면 이 작가'님'은 빼 놓을 수가 없다. 박경리. 굳이 정확히 말을 해 보자면 이 분의 이름보다 먼저 떠 오르는 '토지'가 주는 장대한 스케일에서 오는 위압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건 분명하게도 위압이다. 꼬박 26년간을 한 스토리를 향해 있다는 것, 게다가 그 작품이 죽기 전에 해야 할 도전과제 중 하나로 사람들의 입에 식지 않고 오르내린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의 생각을 제압할 수 있는 유무형적인 힘이다. 사실, 그런 이유로라도 눈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런 마음가짐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작가라는 휴리스틱이 작동한 결과다. 그럼에도 읽어봐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자의반 타의반 손에 잡아 든 책이 '김약국네 딸들'이다. 16권 대신 1권인 셈이니 이건 꿩 대신 병아리인 셈이라 할지라도.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통영의 부유한 한 가정이 욕망과 운명에 요동치며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서사라고 줄여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다. 적지 않은 인물들이 그들의 고유한 프로파일을 가지고 변함없이 꾸준하게 그려져 행동에 대한 이해-물론 역할 및 사고방식의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에 어색함이 없다. 대사는 방언을 그대로 살린 구어로, 반면에 서사는 문어로 이뤄져있어서 레인을 헤집으며 수영하는 맛이랄까. 한마디로 정의가 어려운 이 책이 나는 왠지 고독했다.
김약국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샤머니즘적으로 김약국의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부모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김약국이었기에 다섯딸들에게 의도적으로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안해 나도 아빠가 처음이야라는 마음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보살피지 않음으로 보살핀건지도 모른다.
자기의 허한 곳을 찔린 아픔이었다. 김약국은 초조하고 삶에 대한 애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의원으로서 짐작되는 바를 부정하려든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은 너무나 뼈저린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약국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 비참한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아픈 상처는 혼자 남몰래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남의 설움을 따스하게 만져주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고통도 혼자만이 지녀야 한다는 일종의 고집이다.(중략) 그러나 그는 애써 지켜온 고독, 그 고독을 즐기기조차 했던 지난날에 비하여 너무나 비참하게 그 고독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다. 표연히 갈 길을 가야 하는 마음의 준비는 없었다. (p.337)
그럼에도 우리가 모두 한 번 쯤은 가졌을 법한 감정이 아닌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지가 되지 못했으니 마지막까지 혼자여야 한다는 다짐은 비단 김약국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때로는 의지하고 난 후 느끼게 되는 공허함이 못견디게 더 큰 괴로움으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는 것이다. 최근 가장 의지하던 친구에게서 '내가 정작 힘들 때에는 너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 마상을 진하게 얻은 터라 더욱 이해가 가던 이 문단이 마음 쓰리다.
김약국의 딸들
아니다, 비극의 서막은 김약국의 결혼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 책은 본격적으로 '굳이, 꼭, 반드시 결혼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있지만 동분서주 혼자 애태우는 한실댁도, 일찍 혼자가 되어 간탐하게 된 첫째도, 미치광이가 된 셋째도, 안타깝게 죽게 된 넷째도 딸들이 저주를 받아서, 혹은 그런 운명을 타고나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와의 인연을 억지로 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비록 홍섭에게 버림을 받고(나쁜ㅅㄲ) '노처녀'라는 골칫거리로 본인을 소개한다 하더라고 결국에는 본인의 의지를 갖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용빈만이 이 아수라장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매우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고, 불편하다면 불편하다고 할 수 있는 지점이나, 이 글이 쓰였던 시대를 고려해본다면 그려려니한 시대상으로 생각하고 넘겨가기로 한다.
외롭다고 생각말기
"서울이라구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 외롭다는 말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냐고 되묻는 말은 상반된 대화다. 그러나 용빈은 김약국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외로움이 있다' (p.358)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는 정현종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외로운지도 모르고 외롭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 읽었다는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지만 묵묵히 서울로 다시 향한 용빈이와 용혜처럼 그럼에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다행이다. 사연없는 무덤 없듯, 각자의 이유로 모두 외롭다. 오늘만큼은 오지랖이라 생각하지 말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하루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