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인가 싶은 일의 기쁨과 슬픔
책의 마지막을 덮고 가만히 이 책을 쳐다보면서 나는 왜 수지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알게 되었달까. 주위에 있을 것 같은 얼굴인데 찾아보면 죽어도 없는, 미치도록 친숙하게 예뻐서 속절없이 당하게 되는 그런 수지의 마력 같은 매력이랄까. (고백하건대 나는 수지를 매우 좋아한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담백함이라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리게 하는 그런 매력.
직장경험이 없는 20-30대라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그 미묘함을 낯 뜨겁게 대면시키는 소재는 충격적이다 못해 어이가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작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해 보일만큼 사실적이고, 이야기 역시 경험담 내지는 '나는 아니고 내 친구의 친구 얘기인데 말이야~'라고 시작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다.
잘 살겠습니다
빛나 언니에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이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바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p.29)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어린 마음에 '내 결혼식에 아무도 안 오면 어떻게 해' 란 생각 반, '우리가 남이가'란 생각 반으로 그냥 잔치다 싶으면 참석했던 게 나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왜 갔지 싶어 헛웃음이 나는 건도 여러 건인데 이런 현실감 돋는 청첩장 이야기라니. 티 없이 순수하게 손뼉 치고 물어보면서 정작 결혼식엔 안 와 ^^. 그런 게 짜증나는 내가 미친건지, 상대방이 미친건지, 이 사회가 미친건지, 정말 미쳐버리는. 그런데 저런 사람 꼭 하나씩은 있다는 게 더 미쳐버리게 무섭다. 청첩장은 모바일로 줬으면 왜 자꾸 꼭 오라는 건지, 굳이굳이 보내 준 청첩장 말미에 적혀 있는'결혼식은 지정좌석제로 운영됩니다'는 뭐라고 해석해야 하는 건지 (오라는거야 말라는거야), 청첩장 안 준 걸 아는 척 해야하는건지 말아야 하는건지, 아니 이 결혼식은 도대체 얼마를 축의 해야하는건지. 주위 사람들의 좋은 일에 함께 축배를 넘치도록 가득 따라 양 손으로 들어줘야 하는 건 당연지사지만, 가끔씩 일어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은 고민스럽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우리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맥락과 그로부터 비롯된 웃음 코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p.68)
사람을 만날 때 나는 폐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어쩌면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었던건지도 모른다.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람을 잘 믿지 못해서 진입장벽을 높게 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을 더 크게 부각해서 아예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쳐 내버리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래놓고 맨날 외롭대. 그래놓고 맨날 슬럼프가 온대. 그런데 그러니까 바로 딱 이거. 다 덜어내고 딱 내 마음이 딱 저거인 것 같다. 공유되는 맥락과 웃음 코드, 비슷한 말의 온도를 가진 사람에게 360도로 열리는 것. 그래서 저런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하고 앞으로 어떻게 계속될까란 생각에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 그래 이제 새해인데 올해는 마음 좀 열자. 마음을 열어야지 맥락이 생길 것이 아니냐며. 그래야 후쿠오카던, 삿뽀로던, 일본 아니더라도 쩌거라도 갈 게아니냐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좀 말 잘하는 재밌는 사람이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가 물었다.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p.96)
도움의 손길
이사 오고 나서는 하동안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집도 내 것이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가 고른 내 것인데, 그런 집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내 것 같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이상한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잠들었다가도 쉽게 깼다. (p.130)
연애 중 헤어지는 이유가 별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아이를 갖고,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힘든 이유는 엄청나게 큰 한 두 개의 이유보다 자잘자잘한 수십가지의 이유일 수 있고, 그 단편은 그 수십가지의 이유 중에서 몇 가지를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아 그러니까 청소라도 누가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참 재밌는 건 또 그게 다가 아니다. 깐깐스럽게 먼지 한 톨까지 다 체크하면서도, 아줌마를 불러놓고 점심 한 번을 안 주고, 살가운 소리 한 번을 안 하는데 이건 또 맞는 건가. 모든 관계가 기브 앤 테이크, 갑과 을로 구분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무서운 세상. 돈이 전부면서도 전부가 아닌 세상이라는 걸 은근하게 눙치는데 정말 이 이야기만큼은 예고된 내 미래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을 쓰고 싶어 졌다. 나도 어느덧 회사 10년인데 이 정도면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이야기 너덧개는 논 할 정도가 되지 않았는가. (라떼를 논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끄적이다 보면서 생각하겠지. 그 소설 정말 말도 안 되게 소설 쓰게 하는 이상한 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