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타이밍
술 먹으면서 끄집어 내는 비밀스런 얘기보다 여행하면서 슬그머니 하나씩 내어놓은 아름답게 찌질하고, 슬프도록 당황스러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더 재밌다. 무서운 건 이런 류의 이야기는 전염성이 너무 커서 ‘와 내가 너무 찌질해서 이 이야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로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마치 방판 사원이 보따리풀 듯 주저리주저리 널어 놓게된다는 것이다.
벌써 레이캬비크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북쪽의 수많은 유혹들을 억지로 안 보이는 척 외면하고 U턴을 하는 날이다. 난 원래 겁도 많고, 걱정도 많다. 결정을 하면 무섭게 직진하지만, 태생이 소심한 탓이다.(지금 이 문장에 모순이 있다는 거, 나도 인정) 앞서 말했듯이 운전에 방해될까 노래도 크게 못 틀고, 돌 튀는 소리가 들리면 개미속도가 되고, 아무리 비경이라 할지라도 절벽은 근처도 가지 못하며, 백야의 밤길도 술꾼들이 무서워 나가지 않는 겁쟁이다. 우리는 처음 계획을 짤 때, 일정 중의 돌발변수를 고려해 무리하지 않기로 해서 (서울로 돌아오긴 해야하기에) 하루의 여유를 두고 먼저 레이캬비크로 돌아오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날씨가 좋으면 모래에 내가 비치는 반영샷(=인스타용 갬성샷)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길래 서둘러 그 곳에 들렀다가, 레이캬비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은 이유는 반영샷을 찍을 수 있는 확률 30, 찍을 수 없는 확률이 70이었기 때문-실제로 블로그들을 찾아보니 못 찍고 돌아간 사람이 상당수-이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니까 성공의 30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처음 그 곳은 우리에게 매우 불친절한 그냥 검은 모래밭이었다. 어떠한 안내표지도 없이 인스타그램에서 얼핏 본 배경만 있지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는 당황스러운 곳이었다. 왜 이렇게 황망한 모래밭이지싶은 순간, ‘여기 까지 왔는데 그래도 걸어나 보죠’ 하고 차를 나서는 자가 있었으니, 태초의 자연에서 만난 신밧드모드의 dana님이었다.
역시 high risk, high return은 투자명언이 아니라 그냥 인생 전반에 걸친 명언이다. 우리는 그 어렵다던 반영샷에 성공해버렸다. 한 번 증명샷이나 찍자는 순간 우리는 바로 우리가 봐 왔던 그 공간, 그 지점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꺅꺅거리는 돌고래소리로 사진을 찍고, 마치 밀물이 오는 듯한 느낌으로 후다닥 뛰어 나오는 순간까지 정말 순식간이었고, 웃지 않은 순간들이 없었다. 아이슬란드 남부의 모든 곳이 끝까지 우리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레이캬비크로 가는 500km의 여정이 응원 받는 느낌이었다. 우리 정말 대박이야! 우리 정말 멋져! 신나게 자축하며 다시 길을 나서는데, 운전하는 내 옆으로 정말 기가 막힌 하늘-바다 반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급히 차를 세웠고, 나는 무엇에 이끌이듯 그 바다로 뛰어 들었다. 성큼성큼.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뻘이었다.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허둥지둥 운 좋게 빠져나오긴 했는데 신발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헤헤 스웨이드재질이라 구제불능. 괜찮냐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아, 이 신발 전남친이랑 헤어지는 날에 홧김에 산 건데 왜 지금, 이 좋은 곳까지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네요. 버리죠 뭐, 괜찮아요! 신발 많은데요 뭐! 와 잘 됐네요 하하하하 이참에 다 버리죠 뭐’ 아.. 내 주둥이도 구제불능의 뻘에 같이 빠져버렸구나. 젠장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허할때 운동화를 산다. 매일 이 힐 위로 올라타야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그 지리한 기분을 떨쳐내기에는 운동화가 제격인가 보다. 같은 이유에서 또 이 운동화를 샀나본데, 도대체 이런 불편한 사연을 왜 기억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순간에 왜 랩으로 고해성사를 해 버린건지 식은땀이 개미처럼 스멀스멀 흘러내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운동화도 뒷자리에 같이 태웠다. 살려보겠다는 의도라기 보다, 그 좋은 곳에 버리고 오기 싫었다. 버리더라도 못 쓸 놈이라는 거 똑똑히 확인하고 내가 꼭 쓰레기통에 미련없이 버려주겠다. 시간도 지났는데 왜 신발에 이렇게 의미부여하는지 모르겠으나, 그 때 그 마음이 그랬다. 또 놀란 마음으로 쿵덕거리고 있을게 뻔한데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음을 간파당해버린 나는 한바탕 놀림을 당했지만, 그리고 우리는 내내 낄낄거렸지만 하나 둘 아까 그 ‘방판 사원의 보따리 속 물건’처럼 마음의 이야기보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운동화는 끝내 버려졌다. 역시나 그 끈덕진 머드는 운동화에 떡하니 달라붙어 그대로 말라버렸고,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모든 것은 타이밍
타이밍, 또 타이밍. 물 들어올 때 노저어야 할 때도 있지만, 잘 접어서 놓아줘야하는 타이밍도 있는 법도 있는 법이다. 또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모르는 척 해야하는 시기도. 무서운 현실주의자면서도 과거의 추억에 묻혀 살고, 때론 미래에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에 허덕이는 것도 다 내가 타이밍조절을 못한 탓이리라. 지금의 나를 믿으면 모든 것에 특별한 의미부여 없이도-이상한 타이밍에 헤어짐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현재가 행복할 것임을 확신하며, 이렇게 레이캬비크로 돌아간다.
ps. 겁 많고, 조심하는 사람이 거긴 왜 그렇게 들어갔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그 이유는 진짜 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