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부르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본의아니게 연달아 외로움에 관한 책을 읽었다. 아니, 본의일지도 모르겠다. 파브르가 쓴 자연도감 후속작 즈음일 줄 알았는데 작가가 처음부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려 했던, '외로움'에 대한 책이었다. 사람들의 늪에 버려진 카야가 사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근근하게 사람과 관계를 맺어 모든 것을 홀로 체화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고요하고 쓸쓸하다. 기대를 걸었다 버림을 받고 사랑을 주었다가 배신당하면서도 두려움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에게 다른 사람이 그러했듯한 찬사를 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자연의 본능과 인간의 본성을 연결 지어 서술한 부분은 분명 매우 흥미로웠지만, 야생적이지만 아름다운 백인으로의 주인공 설정, 여성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들의 시각, 나름의 반전일지 모르는 책의 결말 등은 새롭지- 오히려 너무 전형적- 않았고, 심지어 어느 부분은 다소 언짢기까지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작년 가을쯤 봤던 한 영화가 생각이 문득문득 스쳤다. 1,000만이 봤다던 영화도, 국제영화제에서 제일의 상을 탔다던 영화도 심드렁했던 나를 개봉일도 훨씬 전부터 들썩이게 한 영화였다. 도무지 영화에는 취미가 생기지 않던 나를 자리에 앉혀 기록까지 남기게 한, 듣던 대로 영상과 음악이 우아해서 더욱 처연했던,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이 많이 아팠던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이다.
아서든, 카야든 두 주인공 모두 환경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어 사회에서 소외된 생활을 한다. <조커>는 그렇지 못한 환경임에도 행복해야 한다는, 웃어야한다는 강박이 가져온 일그러진 영웅이었다면 이 책의 <카야>는 습지의 판잣집으로 대변되는 고독한 정글에서 '생존'함에 하루하루를 견디는 그냥 우리 중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준 타인에게는 얼어붙은 마음 속의 작은 관용을 베풀지만, 주는대로 돌려받지 못하고 악의를 갖게 되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일종의 불쾌한 감정 혹은 분노의 행동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통제라는 부분은 교육을 통해-특히 사회화- 길러진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들의 결말은 참으로 쓰다. 비단 콘텐츠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를 신뢰해 의심갖지 않는 상호관계를 만들고, 지속시키고, 강화하는 진정성있는 관계를 맺기가 어려운건 지금 여기 우리도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서운함이 배신감이 되고 그런 종류의 배신감은 또 다른 관계들을 갉아먹지만, 혼자 남겨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또 노오력을 하고, 그런 노력은 다시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되고, 믿음은 기대로 바뀌면서 다시 서운함이 생기고 무한 반복이다.
카야는 본인을 이해했을 때, 본인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었고,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당장 내 옆에 좋은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감을 위해 필요하겠지만, 결국 우리는 혼자 남기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나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것의 기준을 내 안에 둬야겠다. '이렇게 행동해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같이 기준점을 타인에게 두었다가는 나는 오간데 없이 부유하는 바람인형이나 다를바가 없어질테니 말이다. 나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 질 때 비로소 나의 진가를 알아 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