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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Sep 06. 2021

밝은 밤, 최은영 (2021)

채찍질을 멈춰야 맞이하는 밝은 밤


n년 전쯤에 단편집의 쌍두마차였던 <쇼코의 미소>와 <바깥은 여름>. 나는 압도적으로 <바깥은 여름>을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가끔씩 몇 구절이 생각나는, 현재 진행형으로도 아주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 기억들이 좋아 나는 여전히 단편집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다. 혹자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어떤 서사를 읽어 낼 수 있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상황에 순간적으로 폭 하고 빠지는 그 집중의 시간이 아주 매력적일 따름.


<쇼코의 미소>보다는 감정이 뭍까지 올라온 <내게 무해한 사람> 역시 좋았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가 첫 장편소설을 내었다 했을 때, 읽어야겠다 생각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느 작가의 어떤 책이든 줄거리를 먼저 보게 되면 내가 기대하는 어떤 상이 맺히게 되는데, 그것과 실제 내용이 다르면 흥미의 요소로 다가오기보다는, 몰이해의 영역으로 가게 되는 자기주장이 강한 독자라..(먼산) 오히려 끝까지 다 읽고 싶어 줄거리는 미리 찾아보지 않았다.



밝은 밤
그때의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서울에서처럼 친구와 한참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깝고 끈끈해서 속까지 다 보여주고 서로에게 치대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했다. (p.14)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p.298)


인물의 대부분이 이름 대신 고조모, 증조모, 할머니같이 관계를 지칭하는 명사로 불리는 통에 갑자기 이름이 나오면 '도대체 누구의 엄마를 말하는 거냐'며 책 앞을 뒤적인 그런 '증모할머니-할머니-엄마를 거쳐 나에게 도착한 이야기'다. 구성상으로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도 생각이 났고, 배경적으로는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도 생각났는데, 전체적으로 아쉽긴 했다. '갑자기?' 하는 부분-더는 말 못함-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 가능한 선함의 범주 안에 있는 것도 심심하긴 했다. 사실, 커피 말고 차, 자동차 아니고 자전거 같은 저자극 맑은 맛이 최은영 작가 특유의 톤이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기형적으로 뒤틀린 인물 열전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심심함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느 한 문장, 어떨 땐 한 단락 전체가 이런 문장은 어떻게 쓰는 걸까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때로는 끝없이 침잠해서 감상적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p.64)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는 것, 자꾸 의지하게 되고, 너무 의지하게 돼서 불안한 그런 마음을 이렇게 쓸 일이냐고.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산다니.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중략)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p.156)


존재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자기애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런 존재의 의미는 만드는 것이라 코웃음 쳤다. 완벽주의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냥 그려려니.. 했을 정도로 스스로의 기준에서 납득이 가능할 결과를 내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했던 거 같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읽은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의 작가의 말에도 동의했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덕이지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고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다고. 그런데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가 내 존재에 대해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져버리지 않아야, 다른 사람도 나를 그래도 그 정도쯤이라도 대하는 것은 아닌 걸까 싶다. 웃어주면 우습게 보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 탓을 한 번 더 해야 하는 건가.




나의 희령 찾기


희령이라는 치유의 공간이 그렇게 와닿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지점은 살아진다는 것. 너무 아프지도 말고, 아프게 하지도 말고, 스스로 순간을 누리면서 견디면서 그 안의 ‘좋음’을 또 느끼면서 살게 된다는 것. 어쨌든 이 삶은 계속되어질 테니까. 너무 가혹하지 않게, Life goes on.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며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 보다 생각할 때.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p.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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