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i Jul 30. 2017

82년생 김지영, 조남주(2016)

지금 사회의 보통 여자 82년생 김지영

그냥 이 책은 읽기가 싫었다. 꽤 오래 전부터 서점에 갈 때마다 눈 여겨 보던 책이었는데 선뜻 손에 집히질 않았다.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스물스물 흘러나왔다. 우리 주위의, 우리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현실적이라고 했다. 아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숨막힐 것 같다. 원래 너무 현실적이면 낭만이 없어 마주하기 싫은 법이다.


어느 날 출근길에 친한 오빠와의 대화 중에 '요즘 읽을 책 없냐'며 물었더니,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간만에 긴 글을 끄적여보고 싶게 만든 책이라며 권해주는데, 또 이 책이었다. 아.. 읽기는 싫은데 이제는 미룰만큼 미뤘다 싶기도 했다. 서점 한 구석에 앉아서 단숨에 한 챕터를 읽었다. 김지영씨 정신이 온전치 않음을 보여주는 첫 장이었다. 왜 그럴까. 왠지 내가 알 법한, 내가 한 번은 겪어봄직한 일들과 감정들을 마주할까봐 주저 하며 그렇게 일주일동안 이 책을 읽었다.


읽으려고 사는게 아니라 사놔서 읽는 거라고 믿는 나


존버정신


이 책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36년동안의 대한민국 보통 여성 성장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가는 (어쩌면 버텨내는) 과정 기술 쯤이다. 굳이 이걸 나는 거대 사회 담론이 되어 버린 페미니즘과 연결짓고 싶지 않다. 굳이 남자/여자를 따지지 않고도, 신구세대를 가르지 않고도 충분히 공감 할 수 있는 내용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하고 건조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 또한 여자라는 이유로 50번대 시작하는 뒷번호를 받아본 적이 있었고, 모기업 면접장에서 남자지원자들과는 다른, 여자이기 때문에 받아야하는 절대 유쾌할 수 없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으며(심지어 그런 질문은 당연히 나올 줄 알고 준비도 해 갔었다), 신입때는 조직의 자랑스러운 구성원이 되기 위한 열정덩어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의 섭리에 헤드샷도 얻어 맞아봤고, 미래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그 때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외면하기도 한다.


김지영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 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게 과연 공정한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 (p.123)


조직에서 여성구성원으로서 살아남기. 하고 싶은 말이, 듣고 싶은 말이 많은 부분이다. 7년 전엔 패기 돋고, 열정넘치고 재치 넘치던 나와 내 동기들이 어떻게 이렇게 현실순응적이게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잘 모르겠다. 이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던 사회라는 것인지, 이런게 바로 조직이라는건지. 생각하면 입 맛이 쓰다.




김지영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중략) 홧금에 김지영씨는 늦게 출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할거라고 (중략) 어쩌면 자신이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 (p.139)


사회는 바쁘게 바뀌어 가고, 그걸 뒷받침 해 줄 제도는 느리게 논의되어 가고, 사람들의 의식은 그 보다도 더 느리게 바뀌어간다. 김지영씨처럼 내 안에 너무 많은 사람이 살아버리게 되는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여되는 기대역할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내 속에 가둔 채 살아야 해야할까. 어쩌면 살아내야 한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그런 우스갯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취준생일 때는 점심시간에 회사 앞에서 쏟아져 나오는 회사원들이 죄다 웃고 있어서 화가 났는데, 막상 회사를 다녀보니 그냥 밖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웃는거였다는. 반차를 써 평일 오후에 사무실에서 나와보면 어쩜 그리 내 또래 애기엄마들이 많은지. 어쩜 내 또래들이 카페에서 하하호호하고 있는지. 아 나는 회사 일이 너무 벅차고, 미래 생각에 1초마다 조울증이 찾아 오는데 뭐가 저렇게 여유있고, 즐거워보이는지 그들이 얄미울만큼 부러운 적이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하려고. (중략)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실 자격도 없어?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p.164-165)



나는 그래도 82년생 김지영씨가 부럽다. 계속해 주위에 속내를 터놓고 지낼 수 있는 한 명쯤-엄마고, 친구고, 남자친구고, 직장 동료고, 남편이고-은 계속 해 있다는 게 부럽다. 생각을 공유하고, 그 시간을 통해 안정감을 되찾고,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향해 내딛을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 부러웠다. 편하고 좋은 만남뒤엔 어김없이 좋은 사람이 되자는 다짐을 하는 나를 나부터 더 믿어야겠지.


눈빛의 온도


이 책의 마무리는 무책임하다. 김지영씨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의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다' 식의 이야기였다가, 몇 번의 유산위기를 넘기고 사표를 내자 후임자는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며 마무리한다. 마무리는 읽은 사람의 몫이다. 당장 어떤 시스템을 만들고 말고의 문제보다는, 서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나치는 눈빛의 온도를 단 1도만으로도 올리는게 더 중요할 것 같다. 원래 태풍도 나비의 작은 날개짓에서 시작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아야코 (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