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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우 Oct 01. 2021

독서이력서

담아내기

  개인적인 독서의 역사를 고백해보자면 이또한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중대사한 기억으로 각인될만한 일은 대부분 그 무렵이니 기억력의 한계인건지, 사실이 그랬던건지는 알 턱이 없다. 단지 영유아용 하드커버 동화책이 흔치 않던 시절일테니 본격적인 독서는 그쯤부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열 살 남짓 무렵 외갓집 양옥, 축축한 지하 창고에서 그 나이 또래라면 환호성을 질렀을법한 만화책을 한꾸러미 발견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본격적인 자발적 독서의 시작이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외가에 맡겨져 무료한 방과후를 보내던 아이의 소중한 친구가 된 <캔디캔디>와의 운명적 조우였다. (최근에 칼라애장판 전집을 들였다. 역시 어른이 되어 다시 봐도 실망시키지 않는 수작이었다)

그후로 양장판 위인 전집들과 <삼국지>, 88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여행 자율화가 시작될 무렵 호기심과 동경에 많은 가정에 구비되었을 <김찬삼의 세계여행>전집이 우리집에 들어왔다. 비록 엄마의 바대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인재는 되지 못했지만 그때부터 원대한 방랑벽에의 의지가 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중학생 되고부터는 아예 도서관에 발도장을 찍으며 고전문학전집을 탐독해갔다. 서가에서 내가 읽은 부분의 영역이 점점 넓어질때면 혼자만 아는 희열을 느끼곤 했다.

 <제인에어>, <오만과 편견>, <운현궁의 봄>, <상록수 >처럼 의지가 강한 주인공들의 악전고투가 담긴 소설이 내가 선호하는 장르였다. 읽은 권수가 늘고, 시각적으로 체감하는 독파 면적 넓어질수록 책을 선택하는 취향도 확고해져갔다.

 미대를 준비하던 고교때는 관적이고 시각적 메세지가 큰 만화책들에 매료되었다. 읽는데 물리적 시간을 요하는 고전 대신 가볍게 머리를 식힌다는 명목하에 집어들었다.

  여기까지가 인생 초반까지의 단조롭고 편향된 독서편력되시겠다.

 

  나란 인간은 독서에 있어서 편식이 유독 심해서 다방면으로 두루 섭렵하지 못한다.

쇼핑을 가도 늘 비슷한 색상과 유형의 아이템을 구매하기에 옷장을 열면 새로 들인 옷이 기존 옷들과 별다른 구별없이 조를 이루어 섞여들어 있다.

  일장일단이 있는 확고한 취향 덕분에 비어있는 지식의 영역 존재하고, 깊이없는 지혜의 가벼움이 존재한다.

 기존의 편중된 방식과 작별을 고하고 다른 양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아마 직장 생활을 하고, 출산을 한 뒤였을 것이다.

대학 전공서를 제외하고 한번도 내 독서 이력 상위에 링크된 적이 없던 실용서가 필요에 의해 등장했다.

  임신과 출산은 내 삶에 지각 변동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책을 선택하는 취향마저 바꿔놓았다.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운 <임신 출산 대백과>, <삐뽀삐뽀119>같은 필수서적을 필두로 이유식, 아이의 정서지능, 아들 육아법, 하브루타 교육, 프랑스와 북유럽식 양육법, 잠수네 공부법 등에 관한 책들을 순차적으로 책장에 들였다.

  아이의 생존과 안위가 무엇보다 최우선시되던 육아 초보에게 맘카페 가입만큼 필요한 수순이었다. 실존과 이론을 병행하며 변수와 다양성을 마주할 때마다 글로 배운 한계는 유사한 무지함을 헤쳐나가는 이들의 시행착오와 좀더 앞서간 사람들의 지혜를 빌려 보완해갔다.

  생전 처음 주어진 엄마 역할이 신산하게 여겨질때면 <엄마되기의 민낯>,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처럼 전직 디자이너, 기자였던 저자들의 에세이에서 위안을 받았다. 노련하게 잘 키우기보다 사실은 인간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라고 고백하고 투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과 의지로  잘 헤쳐나갈거라는  이야기에 망을 얻었다.

  육아의 균형이 성적과 외적 성장에 치우쳐진건 아닐까 반성이 될때면 아이와 함께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오소희 작가의 여행기나, 사춘기 아들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른 두준열 작가의 모험기에 대리 만족했다.

 학창 시절 진저리를 치며 멀리하던 <이토아름다운 수학이라면>, <열두발자국>,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김상욱의 과학공부>같은 수•과학서를 읽기 시작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독서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탐독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독서의 다변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그 태동기는 퇴사를 결심한 직후부터이기도 했다.

재직중에는 회사 필독서 정도나 겨우 읽어내던 내게 독서는 언감생심 시간이 허할때나 가능할법한 사치였다. 업무에 지쳐 글을 읽고 음미하며 소화할 여력이 없었다.

  지진이 있기 전 지표면의 동물들이 낌새를 알아채고 멀리 피신을 가듯 퇴사를 결심할 무렵부터 이미 마음속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굴곡진 직장맘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출퇴근길 손에는 여행책이 들려있었다.

인생의 시계가 다시 맞춰지고 나서야 비로소 오랜 취미를 다시 꺼내들 여유가 생긴 것이다.

회사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듯 여행서를 필두로 그동안 등한시했던 분야의 책들을 집어들었다.

  퇴사를 결심한 직후, 서점가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와 생각을 지닌 작가들의 에세이가 꽤 많음을 알았다. '퇴사해도 별일없이 잘 산다. 아무쪼록 건재하고 무탈하다.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퇴사가 삶에서까지 물러나 뒤처지는 건 아니다'라는 내 마음 속 소리를 대변하듯 글로 대신  위로와 격려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상황과 형편, 호기심과 궁금증, 필요와 욕구, 걱정과 기우에 따라 큐레션하듯 책을 골랐다. 마치 몸의 상태에 따라 약처방이 다르고, 피부의 상태에 따라 화장품 선택이 달라지듯.

때로는 역으로 책을 읽으며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이 그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도 있었다. <트렌드 코리아>, <언택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같은 미래 예측서나 사회 고발성 이슈가 담긴 책들, 사회 초년생일때 봤다면 자존감을 챙기며 업무에 더 박차를 가했을 김미경 사의 자기 계발서들, 부동산, 주등 돈의 흐름에 관한 실용서들, 진애, 유현준 건축가들의 서적들이 그러했다.

<모리 선생과 함께 한 화요일>이나 <죽은 자의 집청소>처럼 죽음을 심도있게 다룬 책들을 보며 삶의 좌표를 재정비하기도 했다.


  삶이 버석거린다고 여겨질 무렵부터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에 담겨있는 개연성과 복선 그 어딘가에서 헤매다. 주인공들과 주변인들의 이름과 사건을 쫓아가기 버거워졌다.

에세이에 매료된 것은 그 즈음부터였다. 현실에 입각한 자전적 고백이 뭉근하게 끓인 스프처럼 지친 심성을 달래주었고, 마음의 정화와 환기, 순환의 통로가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접하던 일회성의 자극적이고,  선택에 의한 편중된 기사만 보던 나는 자발적 리터러시의 차원에서 에세이를 택했다.

동시에 나도 그런 순기능을 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는 내 끄적임의 원천, 뮤즈가 되었다.


 십년 넘게 매주 한두번 정기적으로 도서관에 들른다. 회사에 다닐때 매주 시장조사를 나가고, 브랜드 싸이트를 리서치하던 것처럼 강박적인 걸음에 가깝다.

운동을 안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몸무게의 중압감처럼, 책에 대한 책무라도 있는양 빚진자의 심정으로 방문한다.

  책과 처음 만나는 인사는 띠지를 만지작거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책 날개를 조심히 펼치며 내밀하게 책을 마주한다. 작가의 센스있는 소개에 살며시 미소짓는다.

"이번엔 너로 정했어."

  이것이 나의 독서 이력이자 북 테라피, 책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원기를 얻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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