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가족여행 중에 있었던 추억을 쫓아, 2019년 결혼 후 아이들과 함께 다시 찾은 전남 보성 녹차밭. 2019년에 적어둔 글을 이제야 꺼내본다. 추억이 더 큰 추억으로 돌아온 뜻깊은 여행이었다. 후회만 하고 살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늦었다고 후회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자!
첫 가족여행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엔 트럭이 하나 있었다. 아빠의 일자리이며, 비좁거나 말거나 끼여 타던 이동수단이었다. 그때만 해도 차 없는 집이 많아서 불편한 줄도 몰랐다. 아빠가 새로운 직장에 다니시면서 회사 출퇴근차량을 운행하셨다. 9인승 스타렉스였다. 회사차지만 우리 가족이 모두 탈 수 있는 차가 생겼다.
그동안 당일치기나 1박 2일 나들이만 가봤는데 스타렉스 덕분에 우리는 첫 가족여행을 계획할 수 있었다. 2003년 8월 1일, 우리 가족은 남해여행을 떠났다. 최대한 멀리 가보자며 해남 땅끝마을까지 갔다. 고구마밭도 구경하고 섬도 구경했다. 야외취침할 생각에 텐트까지 챙겨 캠핑을 준비했다. 요즘에야 캠핑이 유행하고 장비가 잘 갖춰져 있지만 그땐 정말 텐트하나랑 이불이 전부였다. 여름이라 무척 더웠고 모기도 정말 많았고 새벽엔 너무 추웠다. 결국 텐트에서 잘 수 없어 새벽에 모두 차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차박으로 고생하고 몸살이 난 우리 가족은 생각보다 여행일정을 당겨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날 목적지로 보성 녹차밭에 갔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녹차밭을 실물로 보니 과연 장관이었다. 산 하나가 녹차밭인데 싱그러운 초록빛이 참 반짝반짝 이뻤다.
녹차냉면 VS. 녹차삼겹살
녹차밭 구경을 마치고 녹차밭 입구 식당이 즐비한 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날씨가 덥기도 했고 간단히 빨리 먹을 수 있는 녹차냉면을 먹기로 했다. 주말이었고 관광지로 유명했던 곳이라 사람이 정말 많았다. 엄마아빠는 차 막힐 시간이라며 빨리 먹고 출발하자고 서두르셨다. 그때 녹차냉면집에서 나는 운명의 녹차삼겹살을 만났다.
평소에도 고기를 좋아하고 육식파였다. 고3 때 아침부터 삼겹살이랑 밥 먹고 학교에 갈 만큼 고기를 좋아했다. 더운 날 넓은 녹차밭을 오르락내리락 걸어 다녔더니 힘들고 배가 많이 고팠다. 식당에 들어가 녹차냉면을 시키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옆 테이블에서는 두툼한 돌판 위에 삼겹살을 지글지글 굽고 있었다. 그냥 삼겹살도 아니고 녹찻물에 숙성시킨 녹차삼겹살이었다. 남 먹는 거 쳐다보면 실례인걸 알면서도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부모님의 한
“아빠, 우리도 녹차삼겹살 먹으면 안 돼? 나도 삼겹살 먹고 싶어!” 아빠는 날도 더운데 무슨 삼겹살이냐며 사람도 많고 복잡하니까 냉면만 먹고 얼른 집에 가자고 하셨다. 엄마도 갈 길이 멀어서 빨리 출발해야 된다고 하셨다. 집에 가면 삼겹살 구워줄 테니 좀 참으라고 하셨다. 내 나이 20살. 부모님께 삼겹살 먹고 싶다고 떼쓰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결국 녹차삼겹살은 냄새만 잔뜩 맡고 녹차냉면을 먹은 뒤 집으로 출발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녹차삼겹살 못 먹고 돌아온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첫 가족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해프닝 중 하나였다. 내가 그 추억을 잊을만할 때마다 엄마아빠는 얘기하셨다. “그때 우리 작은 딸 녹차삼겹살 먹고 싶다고 했는데 못 사준게 아직도 맘에 걸린다.” 나는 벌써 다 잊었는데 부모님은 10년 넘게 그날 일을 회상하시며 후회하셨다.
여수 출장나들이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둘 가진 엄마가 되었다. 우연히 남편이 회사일 때문에 전남 여수에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남편은 직장생활을 하며 주말에만 벼농사를 짓는다. 금요일이 출장이라 주말까지 근처를 여행할 겸 아이 둘을 데리고 출장을 따라나섰다. 여수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그동안 장범준의 ‘여수밤바다’를 들을 때마다 정말 궁금했던 여수에 직접 갈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남편이 여수 볼일을 마치고 집에 올라갈 땐 보성이 가까우니 녹차밭에 가보자고 했다. 내가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으로 보성녹차밭을 자주 얘기하기도 했고, 장인장모님께 녹차삼겹살 사연을 여러 번 들었던 남편이 이 참에 녹차삼겹살의 한을 풀러 가자고 했다. 남편 말을 듣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여수로 출발하는 날은 아침부터 목구멍이 간질간질거렸다. 감동과 설렘이 동시에 찾아온듯했다.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더니 엄마아빠는 나보다 더 신나 하셨다. “이야, 진짜 잘 됐네! 가서 꼭 녹차삼겹살 먹고 와라. 삼겹살값은 아빠가 줄게!”하시며 당장 고깃값을 계좌이체 시켜주셨다. 내가 16년 만에 녹차삼겹살을 먹음으로써 엄마아빠의 한을 풀어드릴 기회가 왔다.
다시 찾은 보성녹차밭
16년 만에 아이 둘을 데리고 다시 찾은 보성녹차밭. 녹차밭 입구를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침 일찍 도착해서 관광객도 없고 조용했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푸릇푸릇한 녹차밭 사이로 가만히 걸어가는데 기분이 참 이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듯했다. 아무도 없는 녹차밭을 독차지했다.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데 그곳에서 뜻밖의 행운을 맞았다. TV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나온 촬영팀이 녹차밭을 찍다가 우리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16년 만에 찾아온 보성녹차밭도 감개무량한데 방송출연이라니! 너무나 긴장되고 설레는 순간이었다. 가슴 벅찬 이 순간을 증거영상으로 남길 수 있어서 참 뿌듯했다. 녹차밭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왔다. 고생을 사서 했다. 그렇게 16년 만에 다시 찾은 녹차밭 구경을 마무리했다.
녹차삼겹살
이제 마지막 미션을 클리어하러 식당을 찾았다. 아쉽게도 16년 전 그 많았던 녹차냉면, 녹차삼겹살 가게들은 다 사라졌다. 녹차밭 입구 쪽에 유일한 녹차삼겹살 식당이 있어서 들어갔다. 그때 그 추억의 식당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먹고 가야 부모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녹차 삼겹살을 주문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음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뭘까? 이곳에서 팔고 있는 녹차삼겹살은 내가 16년 전에 먹고 싶었던 녹찻물 숙성 삼겹살이 아니라 삼겹살 위에 녹차 가루를 솔솔 뿌려 놓은 ‘녹차가루 삼겹살’이었다. 엥?...
이건 내가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아이고 허무해라. 헛웃음이 나왔다. 16년 동안 담아두었던 녹차삼겹살의 한을 제대로 풀고 싶었는데. 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녹차삼겹살맛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 보여주고 싶었는데. 조금 씁쓸했다. 하지만 나는 왔다. 그리고 먹었다. 이제는 후회가 없다. 나도, 부모님도.
어렸을 적 억울한 일은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뒤늦게 놓친 소원을 다시 이루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고 16년 만에 결국 이뤘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녹차삼겹살은 이제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우리 가족의 영원한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