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남편이 밥솥을 질렀다

밥솥하나 바꿨더니 밥 할 맛이 난다

주거분리를 하면서 있는 살림은 그대로 두고 나왔다. 완전히 빈 공간을 새롭게 채워야 했다. 미니멀하게 살고 싶었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꼭 필요한 것들만 빠르고 저렴하게 구입했고 나머지는 살면서 채우기로 했다.



엄마의 낡은 전기밥솥

전기밥솥은 그중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들은 냄비밥을 하거나 압력솥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 나에게 전기밥솥은 필수품이다. 새로 하나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친정집에 있던 낡은 전기밥솥이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멀쩡한 물건을 못 버리는 편이다. 외관뚜껑이 깨지긴 했지만 작동이 잘 되는 전기밥솥이 있었다. '밥솥이 밥만 잘 되면 되지!' 하고 계속 사용하셨는데 이모가 새 밥솥을 선물해 주셨다. 구입한 지 10년도 넘은 전기밥솥이었지만 엄마는 버리지 못했다. 갑자기 새 밥솥이 고장 나면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뒷베란다에 고이 모셔놓았다. 새 밥솥이 왜 고장 날지도 모른다는 건지 이해는 안 되지만. 덕분에 버리지 않고 모셔놓은 전기밥솥을 내가 공짜로 데려왔다.



독보적인 존재감

우리 집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화이트이다. 아이들은 "엄마는 흰색이 제일 좋아?!"라고 말한다. 난 깨끗해 보이고 환해 보이는 흰색 인테리어가 좋다. 그 흰색 주방에 누르팅팅한 친정 엄마의 전기밥솥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쓸만해서 데려왔지만 마음에 썩 들진 않다. 남편이 궁시렁 거린다. "그냥 새로 하나 사지..."


친정 엄마의 전기밥솥은 베이지색이랄까 핑크색이랄까 살구색이랄까 옛날 가전 스타일의 색깔. 아주 독보적인 존재감이 느껴진다. 어디에서 주방을 쳐다봐도 밥솥만 보인다. 아... 눈에 거슬려.



밥 잘 안 되는 전기밥솥

전기밥솥 색깔이 뭐가 중요해. 밥만 잘 되면 되지! 그런데, 밥이 잘 안 된다. 나는 고슬고슬한 밥을 짓고 싶은데 물의 양과 상관없이 누룽지가 생겼다. 의도하지 않게 누룽지를 먹는 것도 중고밥솥의 묘미인가.


10년 넘게 사용하던 거라 청소도 귀찮았다. 밥물 찌든 때가 보였지만 못 본 척했다. 쓸 때마다 찜찜했다.


주방에 들어갈 때마다 맘 쓰였다. 하얗고 깨끗한 새 밥솥을 갖고 싶지만 멀쩡하게 작동되는 전기밥솥을 냉큼 버릴 용기가 없었다. 새 전기밥솥의 가격을 생각하면 멀쩡한 밥솥을 버리기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참고 썼다.



포인트가 들어왔다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이 인터넷쇼핑몰 전기밥솥을 보여주며 "새해 선물로 하나 사줄게, 바꾸자!"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남편이 그동안 참 잘 참아준다 싶었다.


사실 1월이 되어 남편 복지포인트가 새로 들어왔다. 남편이 포인트몰을 구경하다가 흰색 전기밥솥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돈 주고 사긴 아까웠는데 포인트라고 하니 귀가 솔깃했다. "아직 멀쩡한데 바꾸기 아깝잖아."하고 남편이 보여준 전기밥솥을 봤는데 정말 맘에 드는 화이트밥솥이었다. 제품 상세정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진짜 나 사도 돼?" 



어둠을 밝히는 조명효과

주문한 전기밥솥은 생각보다 빨리 배송되었다. 신이 나서 인증샷을 남겼다. (표지사진) 새 밥솥을 주방에 올려놓았다. 밥솥하나 바꿨을 뿐인데 주방의 톤이 더 높아졌다. 흰색 밥솥이 불빛을 반사해서 싱크대 모서리가 밝아졌다. 너무 신기했다. "여보, 주방이 더 환해진 것 같지 않아?" 신이 나서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은 "그렇게 좋아?"라고 말하며 깔깔 웃었다.


이전 밥솥보다 크기가 작아져서 공간도 넓어졌다. 새 밥솥으로 밥을 했다. 밥이 더 맛있는 것 같다. 새 밥 맛이 난다. 기분 탓인가? 남편이 밥 먹다가 무심코 밥솥을 보더니 말했다. "어, 진짜 부엌이 좀 환하다?!" 역시 내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밥 할 맛이 난다

밥이 맛있다. 밥이 고슬고슬 잘 된다. 새 밥솥을 기념하려고 남편이 좋아하는 매운 갈비찜도 했다. 밥도 맛있고 매운 갈비도 맛있다.  


주방을 쳐다만 봐도 좋다. 밥 하는 것도 하나도 안 귀찮다. 설거지하는 것도 하나도 안 귀찮다. 밥 할 맛이 난다. 하얗고 깨끗한 전기밥솥이 너무 맘에 든다. 통일감을 갖춘 흰색 주방이 참 평화롭고 여유롭다. 아 살맛 난다.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해, 물건을 쉽게 사지 못한다. 남편은 궁상이라고 하지만 난 미니멀이라고 말한다. 덕분에 밥솥 하나에 애정을 듬뿍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요리할 맛이 난다. 오늘도 맛있는 밥 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침대를 버리고 바닥을 선택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