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하나의 오늘 5
나이가 든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한때 이렇게 생각한 사람, 바로 나다. 10대에는 20대를, 20,30대에는 40대를 꿈꿨다. 결국 10에도 불만이 있고, 20,30대도 만족하지 않을 삶이었다는 얘기다. 돌이켜보건대 맞는 말이다.
10살 이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형제들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살았다. 서울에 자리를 잡은 큰집이었으니 삼촌이나 이모, 고모가 머물다 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때 이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삼촌과 이모, 고모가 가정을 갖기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형한테 대들고, 형수한테 막말을 해 댔다. 조카가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했다.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녔다.
“삼촌들 양심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먹여주고 입혀주고 결혼까지 도와준 형이랑 형수한테 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요?”
어린 조카의 한 마디에 파르르 떠는 삼촌과 작은 엄마를 보면서 웃음이 났다.
“감히 어른들 말하는데 끼어들어, 버릇없게”
웃기는 소리다. 진짜 소가 웃다가 뒤로 넘어질 소리다. 소가 웃다가 넘어지면 어찌 될까.
나의 10대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더군다나 30년 이상을 몸 바쳐 일한 직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아버지의 어깨는 처질대로 처져 있었다.
중학교를 못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과거의 이런 상황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설마라는 반응을 보인다. 나한테 경제적인 어려움을 찾아보기 힘들어 보인다는 이유다. 입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제야 어려웠나 보네 하는 방응이다.
사람의 생각은 정말이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도 한때는 어려웠던 그 시절을 지금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편하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10대를 돌이켜 보건대 편하지 않았던 그렇다고 불행하진 않았던 때다.
공부는 그저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고, 그래서 은행을 들어갔던 거니까. 교우관계는 딱히 나쁘지는 않아 결혼하고도 만나는 친구가 있긴 했다. 지금이야 연락이 끊어졌지만. 꿈은 확실하진 않지만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은행엘 갔냐고? 먹고 살기 힘든 시간을 보낸 결과라고 해두자.
나의 화두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면 서럽고, 불행했다. 어른들은 모르는 돈이 없어서 서럽던 기억도 10대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조카를 부른 고모는 이렇게 말했다.
“큰 오빠는 왜 지금 직장을 그만둬서 너희들을 고생시키냐.”
40년도 더 넘은 그때 상황은 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고모의 집이 어디였는지, 집의 구조도 생각난다. 그 말을 했던 공간이 나에겐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고모가 준 돈을 주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커봐, 돈 벌어서 너희보다 잘 살 거다.’
돈이 있어야 괄시를 안 받는다고 가르쳐 준 고모한테 고맙다고 해야하나. 다 지난 이야기를 곱씹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다.
요즘 애들이 말하는 나이 먹은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또 하나의 오늘 5
나이가 든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한때 이렇게 생각한 사람, 바로 나다. 10대에는 20대를, 20,30대에는 40대를 꿈꿨다. 결국 10에도 불만이 있고, 20,30대도 만족하지 않을 삶이었다는 얘기다. 돌이켜보건대 맞는 말이다.
10살 이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이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살았다. 서울에 자리를 잡은 큰집이었으니 삼촌이나 이모, 고모가 머물다 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때 이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삼촌과 이모, 고모가 가정을 갖기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형한테 대들고, 형수한테 막말을 해 댔다. 조카가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했다.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녔다.
“삼촌들 양심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먹여주고 입혀주고 결혼까지 도와준 형이랑 형수한테 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요?”
어린 조카의 한 마디에 파르르 떠는 삼촌과 작은 엄마를 보면서 웃음이 났다.
“감히 어른들 말하는데 끼어들어, 버릇없게”
웃기는 소리다. 진짜 소가 웃다가 뒤로 넘어질 소리다. 소가 웃다가 넘어지면 어찌 될까.
나의 10대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더군다나 30년 이상을 몸 바쳐 일한 직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아버지의 어깨는 처질대로 처져 있었다.
중학교를 못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과거의 이런 상황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설마라는 반응을 보인다. 나한테 경제적인 어려움을 찾아보기 힘들어 보인다는 이유다. 입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제야 어려웠나 보네 하는 방응이다.
사람의 생각은 정말이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도 한때는 어려웠던 그 시절을 지금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편하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10대를 돌이켜 보건대 편하지 않았던 그렇다고 불행하진 않았던 때다.
공부는 그저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고, 그래서 은행을 들어갔던 거니까. 교우관계는 딱히 나쁘지는 않아 결혼하고도 만나는 친구가 있긴 했다. 지금이야 연락이 끊어졌지만. 꿈은 확실하진 않지만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은행엘 갔냐고? 먹고 살기 힘든 시간을 보낸 결과라고 해두자.
나의 화두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면 서럽고, 불행했다. 어른들은 모르는 돈이 없어서 서럽던 기억도 10대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조카를 부른 고모는 이렇게 말했다.
“큰 오빠는 왜 지금 직장을 그만둬서 너희들을 고생시키냐.”
40년도 더 넘은 그때 상황은 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고모의 집이 어디였는지, 집의 구조도 생각난다. 그 말을 했던 공간이 나에겐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고모가 준 돈을 주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커봐, 돈 벌어서 너희보다 잘 살 거다.’
돈이 있어야 괄시를 안 받는다고 가르쳐 준 고모한테 고맙다고 해야하나. 다 지난 이야기를 곱씹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었다.
요즘 애들이 말하는 나이 먹은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