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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성 Jun 03. 2021

서원·고택·절경이 펼쳐지는, 안동호 '선비순례길'

경상북도 안동시 안동호

안동호 선비순례길 

경북 안동은 주변에 높은 산이 많지 않고 낙동강의 물줄기가 곁에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었다. 안동댐 건설로 생겨난 안동호는 낙동강 상류 수계에 있는 인공호수다. 강원도 소양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조선 시대에 낙동강은 하류의 배가 안동까지 드나들 정도로 물이 깊고 맑아 관개 및 교통에도 큰 몫을 하였다. 광복 후부터 해마다 홍수의 범람으로 많은 피해를 겪었다. 이에 1971년 안동댐 공사에 착공하여 1976년 10월 28일 준공함으로서 안동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안동시 도산면·예안면·와룡면·임동면·임하면에 걸쳐 있는 안동호에는 연안 일대에 도산 서원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교문화 유적과 석빙고 등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주변의 깊은 계곡과 함께 경관이 빼어나 호반 관광명소로 크게 각광 받고 있다. 2017년에는 ‘안동선비순례길’이 조성되면서 도보로 안동호의 풍광과 비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총 길이 91km, 9개 코스로 조성된 자연 친화적인 탐방로다.     


* 이용문의 : 안동시청 체육관광과 054-840-6391

안동호반자연휴양림

이 길은 옛 성현들의 발자취가 스민 곳이기도 하다. 길 이름에 걸맞게 서당·서원·향교·고택 등을 만나고, 조선 중기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0) 등 옛 선비들이 남긴 삶의 흔적도 접할 수 있다. 안동시 도산면 호숫가의 선성현 문화단지와 군자마을 등에서 한옥 고택 숙박이 가능해 느긋하고 여유롭게 호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군불 때는 냄새, 새하얀 창호지가 발린 문, 빳빳한 광목 이불, 놀러 와서 마당에서 낮잠을 청하는 길고양이 그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시골의 초승달 등 옛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고택에서의 하룻밤. 특별할 것 없는 이 풍경에는 작은 울림이 있다. 소박한 풍경으로 치유가 되는 기분이 든다.    

 

안동호 상류에 있는 안동호반자연휴양림(도산면 동부리)은 아름다운 숲과 호수 경관을 배경으로 전통적인 멋스러움과 현대의 편리성을 담은 이색적인 휴양시설이다. 외부는 아늑한 전통 시골 마을 분위기와 가옥형태는 초가, 기와이며 그리고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넓은 마당과 평상, 원두막이 설치되어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안동호 호숫가 예술마을예끼마을

예술마을로 변신한 예끼마을 

선비순례길 1코스가 시작되는 곳에 '예끼마을'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마을이 여행자를 반긴다.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는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안동에서 가장 상권이 발전된 마을이었지만 댐 건설로 인해 이주하게 되면서 마을이 쇠락한 곳이다. 


안동댐은 낙동강 상류에 들어서 전기를 생산하고 홍수를 조절하는 등 다목적 기능을 수행한 개발연대의 한 상징이지만 뒤에는 마을과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고택, 선비 정신, 학문, 독립운동, 전통이라는 안동의 상징에 수몰의 아픔도 품은 곳이다.     


안동시의 6개면 마을 54곳이 물에 잠기고 주민 2만여 명이 집을 잃은 채 고향을 떠났다. 당시 수몰민 400세대가 도산면 서부리에 모여 마을을 이뤘다. 마을 사람들은 이주하여 새로이 정착한 마을을 ‘예끼마을’이라 이름 지었다. 재주 예(藝)자와 재능, 소질을 뜻하는 우리말 ‘끼’를 합쳐 만들었다.    

 

예끼마을은 2015년 안동시의 ‘예술마을 조성사업’을 지원받아 벽화 골목을 꾸미고 상가 간판도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모양으로 바꿨다. 빈집을 활용해 마을식당, 한옥카페, 안내센터 등으로 꾸몄다. 예술가들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으면서 골목골목에 작은 갤러리 등을 내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

수몰된 예안초등학교 위 산책로
선성현 문화단지 한옥숙박

선비순례길의 백미는 ‘선성수상길’이다. 예끼마을 앞 호수에 약 1km 길이의 부교를 놓았다. 길 중간중간에는 걷다가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 편하게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과거 누군가의 집을, 학교를, 일터를, 골목을 밟고 물 위를 둥둥 떠서 걸어갔다. 다리 중간에는 풍금 조형물과 책걸상을 가져다 두었다. 수몰된 예안초등학교가 이 아래 잠겨 있단다. 당시 마을과 학교 풍경이 담긴 옛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는 마음이 찡하다.      


예끼마을의 옛 이름인 선성(宣城)은 고려 왕조가 세워질 당시 삼국 통일에 기여한 삼태사의 공을 높이 사서 선성군으로 봉해지면서 얻게 됐다. 뒤로는 선성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살기 좋은 마을이다. 선성(宣城)이라는 옛 마을 이름에서 유래해 조성한 곳이 ‘선성현 문화단지’다. 안동호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옛 관아를 복원하여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건립되었다. 역사관, 민가촌, 식당, 한옥체험관, 선성수상길 등을 포함하는 복합문화체험 시설이다.     

국내 유일 유교문화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내 목판

마을에는 국내 유일의 유교문화박물관과 한국국학진흥원이 자리하고 있다. 개별 문중이나 서원으로부터 기탁받아 소장하고 있는 목판, 고서, 고문서 등 20여 만점의 유물 중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250여 종 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품에는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원인 및 전황 등을 관해 기술한 징비록(국보 132호)과 고려 후기 문신 장량수의 진사 급제 교지인 장량수급제패지(국보 181호) 등 국보 2점.     


15세기 양반 가문의 재산분할 상속 문서인 권심처손씨분금문기(보물 549호) 등 보물 10점과 김성일 안경(현존 가장 오래된 안경) 등이 있어 눈길이 머문다. 국학진흥원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 6만 여장 등 영남학파 주요 학자들의 문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목판은 인쇄를 목적으로 여러 가지 내용의 글과 그림을 나무에 새긴 판목이다.     


양반이 쓴 최초의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

군자마을

선비순례길에는 길 이름과 잘 어울리는 ‘군자마을’(안동시 와룡면)도 있다. 600년 내력의 광산 김씨 집성촌 군자마을은 안동말로 '외내'라고도 불린다. 조선 시대 안동 부사가 다녀간 뒤 “이 마을에는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후조당, 탁청정, 읍청정 같은 고택과 정자가 즐비하고, 광산 김씨 예안파 종가 고문서(보물 1018호) 등 문화재가 쏟아져 나온 곳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한옥에서 지금도 주민들이 산다.     


이런 품격 높은 마을이 낳은 흥미로운 파격이 있으니, 바로 사대부가 쓴 최초의 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이 책은 <음식디미방> <온주법>과 함께 안동지역에 전하는 3대 고(古) 조리서 중 하나다. 1491년에 태어난 김유 선생은 출사의 꿈을 접은 채 학문을 닦으며 부모가 계신 마을을 지켰다. 퇴계 이황 선생, 농암 이현보 선생 등이 근처에 거주해 전국의 선비가 드나드는 안동에서 그가 교류한 폭은 넓었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 선생은 접빈객의 가치를 실천했다. 특히 음식에 정성을 기울여 극진히 대접했다.

조선시대 양반가 음식 조리서 <수운잡방>
전망좋은 고택 정자

아름답고 맛과 영양도 더할 나위 없는 음식을 연구하고 실험 개발해 상에 올렸다. 1540년경 이를 정리해 집필한 책이 <수운잡방>이다. 수운(需雲)은 연회 등 음식 관련 행사를 뜻한다. 또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수운잡방>은 곧 음식에 관한 김유의 관심이 교제와 풍류에서 나왔음을 보여 준다. 메뉴는 김치류 17항, 장 9항, 주류 59항 등 121가지에 이른다.     


손자인 계암 김령 선생이 내용을 더해 완성했다. 마을에서는 조선 반가 음식의 정점이라 할 <수운잡방>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눈이 먼저 즐거워하고 정갈한 옛맛에 입이 감동한다. 계암 선생이 지은 정자 계암정에서 풍경과 함께 음식을 음미하는 일은 다른 어디서도 못 할 특별한 체험이다.     


안동하면 아무래도 양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리학의 집대성자 퇴계 이황을 낳았고 그 문하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학자를 길러내 거대한 영남학파를 이루었으니 그 자부심이 과연 헛된 것만은 아니리라. 안동 선비순례길은 퇴계 이황의 귀향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동 도산면은 조선 시대 걸출한 유학자 퇴계 이황의 고향이다. 퇴계 선생은 1569년 선조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서울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안동의 도산서당까지 320㎞를 12일간 걸어서 귀향했다.     


낙동강 제일 절승지, 고산정(孤山亭)

서원 고택과 잘 어울리는 나무

도산서원(안동시 도산면)은 퇴계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으로 조선 시대 선조 7년(1574년)에 세워졌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던 때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다. 안동은 교육의 중심지로 향교와 서원이 발달한 유림의 고장이다. 한국 유교 문화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묵계서원 등을 포함해 전국 서원의 30% 이상이 안동에 보존돼 있다.     


서원 입구에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 맹자가 태어난 추(鄒)나라와 같은 정신적 고장이란 뜻이다. 문과 담을 통과할 때마다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조선 시대로 먼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도산서원은 율곡과도 인연이 깊다.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은 율곡은 실의에 빠져 인생의 나아갈 바를 몰라 방황하다가 금강산에서 칩거 후 58세의 노학자 퇴계를 찾아온다.          

도산서원 건너편의 시사단(試士壇)

3일간 머물면서 깊은 가르침을 받고 거경궁리(居敬窮理,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견지하여 학문을 탐구하라)라는 네 글자를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율곡은 10개월 후 별시에서 장원급제를 했으며, 평생 동안 9번이나 장원급제를 했다. 율곡은 49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퇴계와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쌍벽을 이룬다.     


도산서원 건너편에 섬처럼 자리한 시사단(試士壇,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은 조선 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시사단은 당시 유일하게 지방에서 과거를 본 흔적이다. 작은 보행교를 걸어 건너가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 편’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낙동강변 35번 국도 구간에 별점 하나를 매겼다. 이것은 미슐랭가이드가 한국의 길에다 매긴 유일한 별점이다. 미슐랭의 미식 가이드북인 레드가이드는 식당에 별점을 매기지만, 관광 안내 가이드북인 그린가이드는 여행지에다 별점을 매긴다. 미슐랭은 인색하다. 만점은 별 셋이니, 별점 하나만 받아도 훌륭한 여행지임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강변 마을 풍경이 선정 이유라니 그럴만하다.

불굴의 독립운동가 이육사를 기리는 문학관

안동은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대표적 저항 시인인 이육사(1904~1944)의 고향 역시 도산면으로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있다. 지금까지 이육사가 단순히 광야와 청포도 등을 지은 민족시인 정도로만 알았는데 문학관에서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됐다.     


이육사는 퇴계의 14대손으로 독립운동 중 1944년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는 짧은 일생 동안 무려 17회나 투옥되는 불굴의 독립투사였다. 그의 필명 이육사도 처음에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를 따서 二六四로 했다가 주위의 권유로 다시 李陸史로 고쳤다. 필명 하나만 보아도 그의 항일 투쟁 정신을 알 것 같았다.     


낙동강 제일 절승지라 불리는 고산정(孤山亭)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청량산 서편 자락을 휘어 감고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상류의 맑은 물을 끼고 아늑한 강마을이 앉아 있다. 도산면 가송리 마을이다. 농촌진흥청과 환경부가 농촌전통테마마을 및 생태우수마을로 지정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가송(佳松)이요, 금상첨화로 푸른 강물도 어우러지니 경치야 말할 것도 없다.      


고산정에서 바라보이는 낙동강 건너에 펼쳐진 깎아지른 절벽 내병대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마주 보이는 산이 홀로 고독하게 솟은 고산(孤山)이다. 정자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낙동강 제일 절승지라 불리는 고산정
사랑채 앞 장독대가 정겨운 농암 종택

퇴계 이황의 제자 금산수가 건립한 고산정은 창건 당시부터 안동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알려져 퇴계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자주 왕래하며 남긴 시가 수백 수에 달한다. 청량산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황도 고산정을 자주 왕래하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자 앞에는 강 쪽으로 기운 소나무가 정취를 더해주고 정자 왼쪽에는 70년 전 조선총독부가 세운 먹황새 서식지 표석이 서있다. 이곳은 국내 유일의 먹황새(천연기념물 200호) 서식지로 안동시가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가송리에는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종택과 서원이 마을처럼 펼쳐져 있다. 종택은 농암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이후 후손들이 650년 이상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낙동강 상류의 수려한 풍경과 어우러져 한결 정취가 돋보인다. 일반인들도 농암종택에서 호젓하게 고택 민박체험을 할 수 있다. 사랑채 마루 문 위에 선조 임금이 '베풀며 살라'는 뜻으로 친필로 써준 적선(積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강물 소리를 벗 삼아 드는 잠은 더없이 달디 달 것 같다. 본디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농암의 17대손이 이곳에 새 터를 잡았다. 농암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바른말을 하다가 안동으로 귀양 갔다. 중종반정 이후 복직되어 안동부사, 성주목사, 부제학 등 벼슬을 하다 은퇴 후 귀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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