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북악산(342m)은 청와대를 품고 있는 산이며, 경복궁의 주산(主山, 운수와 기운이 담겨있는 배경이 되는 산)이다. 조선시대 만든 한양도성 성곽길을 통해 오를 수 있지만, 나는 북악산의 속살을 지나는 아늑한 계곡과 숲길을 오르는 코스를 더 좋아한다. 서울시가 조성한 테마산책길인 '세검정 계곡숲길'이다.
따로 길을 만든 게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지나는 길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였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등장하는 세검정, 비밀정원 같이 아늑한 계곡과 울창한 숲길,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 전망대 카페와 맛집이 있는 산 정상 쉼터 북악정까지 이어진다.
산 이름에 ‘악(岳)’자가 들어가면 거칠고 험준하기 십상인데, 이 코스는 둘레길 마냥 걷기 좋은 산책길 같은 숲길이다. 1급수 물이 흐르는 계곡, 청명한 숲, 호젓한 오솔길이 이어지니 자연스레 산속 풍경에 눈길과 발길이 오롯이 머문다. ‘여기가 서울 맞아?’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곳이 이어진다.
상명대학교가 바라보이는 세검정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앞에 홍제천 상류 물소리가 들리고 세검정(종로구 신영동)이 보인다. 다른 정자와 달리 세검정(洗劍亭) 한자 이름이 살벌하다. 조선시대 인조가 이귀, 김류 등 부하들과 함께 쿠데타(인조반정)를 모의하며 칼을 씻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칼로 흥한 인조 임금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당하며 칼로 망한다.
세검정은 더 오래전부터 세초의 현장이었다. 세초(洗草)는 원고지를 씻는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의 누설을 막기 위한 작업을 말한다. 간혹 불태우기도 했으나 보통은 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정말 세검정 앞에서 세초를 했음직한 평평하고 널찍한 너럭바위가 인상적이다.
세검정을 지나면 아담한 소읍 같은 동네 풍경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단층의 집마다 담벼락에 호박, 토마토를 키우고 있어 절로 미소가 번졌다. 부암어린이집으로 가는 골목에 ‘백사실 계곡’ 이정표를 따라 가면 북악산 계곡이 나온다. 산자락에 있는 작은 절 현통사 옆으로 매끈하고 커다란 바위와 그 위로 미끄러지듯 물줄기가 흐른다. 계곡 물소리를 배경으로 들려오는 스님의 불경소리·목탁소리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계곡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산속에 들어서자 '산에 멧돼지가 살고 있으니 주의 바람'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나무들로 울창한 초록의 숲속에 멧돼지보다 더한 짐승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화도 신지 않고 별다른 발품도 들이지 않고 이런 숲속에 들어오니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숲속 길섶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글자가 새겨진 오래된 바위가 눈길을 끌었다. 안내판을 보니 '백석'은 북악산의 옛 이름 ‘백악’을 말한다. '동천'이란 경치가 아주 뛰어난 곳에 붙이는 자구로 이곳이 옛 부터 알아주던 절경이었다는 표시다.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곳'라는 의미다. 동네 주민들 사이엔 '백사실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1급수 맑은 계곡 물이 흐르고 나무들 사이에서 새소리 들려오는 숲이 우거진 백사실 계곡은 도심의 숨은 비경이자 비밀의 정원이다. 계곡에는 조선 시대 별서(농장이나 들 근처에 별장처럼 따로 지어놓고 농사를 짓던 집) 터가 있다. 한옥 건물의 주춧돌과 연못이 남아 있다.
옛 선인들의 별장 터는 아이들이나 다람쥐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는 놀이터가 되었다. 숲에 도토리를 낳는 참나무(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등)가 많아 다람쥐들이 많이 서식한단다. 도토리는 산 짐승들이 가을과 겨울을 나는 소중한 식량이다.
백사실 계곡은 도롱뇽과 가재, 무당개구리, 북방개구리 등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귀한 도롱뇽은 보기 힘들지만 개구리는 개체수가 많아 쉽게 만날 수 있다. 재밌는 이름의 무당개구리는 피부색이 알록달록해 마치 무당 옷을 입은 것 같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신비한 피부를 지니고 있으며, 무려 스무 살까지 산단다.
청정 계곡과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숲 일대는 멀리 강원도의 어느 깊은 산골에 온 듯하다. 서울시가 생태경관보존지역으로 지정할만하다. 텐트나 돗자리 사용이 금지되고 취식을 할 수 없는 곳이다. 덕택에 낭랑한 목소리로 지저귀는 귀여운 새들의 노랫소리, 숲의 고즈넉함과 계곡의 운치를 내내 즐길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사람을 진정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문화나 예술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이 아닌가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길, 달팽이처럼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돌돌돌~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한 사람이 걸어가기 딱 좋은 계곡 옆 오솔길을 걷다보면 시골 민가 같은 수수한 집들이 나온다. 소박한 비닐하우스도 보이고 텃밭에는 호박, 고추 등이 정성스레 심어져 있다. 지금은 심지 않지만 예전엔 능금이 많이 나서 지금도 능금마을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곳이다. 능금마을을 지나면 예쁜 카페들과 맛집, 민족 정서와 철학을 고유의 예술로 승화시킨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김환기 미술관이 자리한 부암동으로 이어진다.
계곡 숲길가에 '약수터(북악산 팔각정)'이라 쓰여 있는 이정표를 따라 산속 숲길을 올라갔다. 산 정상에 있는 명소 팔각정으로 가는 길이자, 오래전부터 동네 주민들이 애용하던 약수터 길이다. 매일 이 숲길을 오간다는 주민 한 분은, 교통사고를 당해 망가졌던 몸이 이젠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완쾌되었다고 한다. 숲은 의사도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재활병원이고, 사람들은 이 병원의 영원한 환자구나 싶다.
숲속 오솔길은 얼마 후 북악산로(북악스카이웨이 옆 산책로)를 만난다. 북악스카이웨이는 남산 순환로처럼 북악산에 난 차도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북악산을 타고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했다가 일망타진된다. 깜놀한 박정희 정권은 수도 및 청와대 방어를 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건설한다. 이어 생겨난 제도가 주민등록증·향토예비군 등이며,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진 것도 이때다.
1968년 조성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통행이 불가능했던 북악스카이웨이는 2007년에야 시민들에 개방됐다.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덕분에 침엽수와 활엽수 나무가 어울려 수목이 울창하다. 산 정상에 오를수록 산등성이를 휘감아 도는 성곽 벽과 빌딩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팔각정 앞쪽으로 북한산 능선이 선명하게 보이고 뒤쪽으로는 남산, 관악산 등이 펼쳐져 조망이 좋다. 카페와 맛집이 자리하고 있어 여유롭게 머물며 주변 풍광을 감상하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