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수도권 전철 3호선 원흥역에 내리면 서삼릉(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길이 있다. 서삼릉길이다. 주택가를 벗어나자마자 울창한 숲길을 만나는데 마침 가을 단풍이 더해져 화려하다. 왕릉에 찾아가는 동안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온 듯 진한 가을 풍경이 이어진다.
서삼릉길엔 보리밥집, 너른마당 등 이름 난 맛집들이 많지만 정작 발길을 머문 건 낙엽 위 카페였다. 푹신푹신한 낙엽 카펫에서 마시는 커피는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카페는 코로나19 걱정도 되고 답답해서 잘 가지 않게 되는 데 이런 카페는 나도 모르게 들르게 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고양시 원당동에는 농협대학교라는 생소한 이름의, 이맘때 가을에는 온통 파스텔톤으로 변신하는 캠퍼스가 있다. 교정은 그리 크지 않지만 크고 작은 다양한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고 넓은 운동장과 잔디밭 그리고 예쁜 생태공원과 산속 오솔길 같은 산책로도 있다. 힘들게 산행을 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가을 풍경이 좋아서 사진 동호회원들이 카메라 둘러메고 출사를 갈만하다. 단풍 명소로 소문이 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일요일에 한해 시민들에게 교정을 공개하고 있다. 가을날 산책하거나 소풍가기 참 좋은 곳이다. 은행 융자는 무섭지만 은행 융단은 한없이 좋기만 하다!
장대한 은사시나무가 도열한 길을 따라 서삼릉에 다다르면 왕릉을 사이에 두고 젖소개량사업소와 원당종마목장이 자리하고 있다. 서삼릉을 산책하다보면 답답하고 좁게 느껴지는데 이 두 곳 때문이다. 본래 서삼릉은 450만㎡(약 136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이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골프장, 젖소개량소, 종마목장 등에 잇따라 자리를 빼앗기면서 당초 면적의 95%가 잘려 나갔다.
젖소개량사업소 정문에 서있는 비석이 눈에 띄었다. 서삼릉 훼손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이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목장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교시에 따라 농협중앙회에 의해 조성됐다. (중략) 훗날 우리 자손은 이 목장을 농촌 근대화를 이룩한 근원의 하나로서, 그리고 한 탁월한 지도자의 농촌을 위하는 지성과 예지의 생생한 증거로서 길이 상기할 것이다.’
조선 왕릉인 희릉, 효릉, 예릉이 자리한 서삼릉. 왕릉의 한자어에는 고인의 성격이나 취향 등이 담겨있어 흥미롭다. 희릉의 희(禧)는 복되다, 효릉의 효(孝)는 부모를 잘 섬기다, 예릉의 예(睿)는 ‘깊고 밝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사연이 느껴지는 무덤은 사릉(思陵)이다. 어린 나이에 권력다툼에 희생된 조선시대 6대 임금인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가 묻힌 능으로, 비명에 간 단종을 생각하며 여생을 살았을 것이라 여겨 무덤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지었다.
서삼릉 안에는 세 왕릉 말고도 공동묘지 같은 공간이 따로 자리하고 있다. 왕자·공주·후궁의 묘 46기, 태실 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임금의 부인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씨의 무덤 회묘(懷墓)도 있다.
이곳은 서삼릉 정문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를 따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마련된 서삼릉의 임시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젖소개량사업소가 서삼릉 한가운데를 자르고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태실(胎室)은 역대 왕과 왕족의 태(胎, 탯줄)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을 말한다. 이는 아기씨의 건강뿐 아니라 왕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왕실 특유의 문화로 꼽혀왔다. 이곳은 비공개 구역으로 온라인 사전 예약 후 해설사와 동행하여 방문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서삼릉 태실 예약’을 검색하면 해당 웹사이트가 나오며 입장료는 무료다.
서삼릉에 있는 태실과 여러 묘 또한 일제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전국 각지 명산에 조성됐던 태실은 조선왕실에서 관리를 임명, 엄격히 보관해왔는데 1928년 조선총독부가 이곳으로 모아 서양식 공동묘지처럼 만들어 훼손한 것이다. 조선왕실에서 태실과 분묘를 조성할 때 핵심적인 요소로 중시했던 ‘길지’란 장소성과 역사적 맥락은 무시되었다.
일제는 당시 화강석 재질의 관으로 태 항아리를 보관하던 우리의 전통적 조성방식인 태함(胎函)을 파헤쳐 시멘트 관으로 바꾸고, 태실 주변에 날 일자(日)형으로 담을 둘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 태실에는 조선 시대 왕의 태실비(胎室碑) 22위와 왕자, 공주의 태실비 32위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왕실의 태 처리는 국운과 관련지어 엄격한 국법으로 장태법(藏胎法)에 따라 행해졌다. 생후 7일에 길방에 안치해 두었던 태(胎)를 백자 항아리에 담아 태봉(태를 봉안할 장소)을 선정하여 묻었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묻은 역사는 7세기 후반 삼국사기에 처음 보이는데 신라시대 김유신의 장태 기록이다.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태봉산 정상에는 백제 무왕(武王)이 3왕자 태실지가 있다. 904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태실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동막리 태봉산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도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태실을 조성했다.
태실과 무덤의 비석마다 상단에 글자를 지운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가 무덤을 이전하면서 일본의 연호(年號)를 새겼던 자리다. 쇼와 시대(昭和時代 쇼와지다이)는 20세기 일본의 연호로, 쇼와 천황의 통치를 뜻한다. 일본에서 연호는 제국주의로 치닫는 계기가 됐던 1868년의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왕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태실 묘역의 유일한 왕릉인 회묘는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의 폐비 윤씨가 잠들어있다. 아들 융(연산군)을 낳으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서 폐비된 후 사약을 받고 말았다. 조선 역사상 왕비가 사사된 최초의 사건이다.
이는 후일 왕이 된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부관참시(무덤에서 관을 꺼내어, 그 관을 부수고 시신을 참수하는 것)까지 저지르면서 폭군이 되는 계기가 된다.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참소하여 죽게 했다 하여, 정씨의 아들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으로 하여금 때려죽이게 하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연산군은 내수사를 시켜 그들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리게 하였다.
폐비 윤씨의 회묘는 아들 연산군의 정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회묘의 회(懷)자 또한 품, 마음, 정(情) 등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능을 에두른 난간석(병풍석)을 비롯해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석마 등 많은 석물들이 무덤을 지키고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