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오름, 목장, 마을을 지나는 비자림로 라이딩
주로 여름에 때때로 가을에 가곤 했던 제주섬에 난생 처음 겨울에 찾아 갔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어제 오늘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전혀 다른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섬이라 겨울엔 또 어떤 풍광을 보여줄까. 눈 내린 겨울날 화산섬 제주는 어떤 느낌일까, 무척이나 궁금하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겨울 제주 자전거여행을 떠났다.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소울 플레이스(Soul Place)를 마주하게 되리란 것을 까마득히 모른 채…. 돌이켜보니 가장 따듯했던 겨울여행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나날이었다.
지도를 펼쳐들고 어디를 달려갈까 유심히 보던 중 제주도 내륙에 난 도로들이 눈에 띄었다. 제주도 자전거 여행하면 보통 호쾌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에메랄드빛 해안가를 달리는 상상을 한다. 이번엔 뻔한 여행에서 벗어나 제주도 내륙을 횡단하는 거의 도전에 가까운 자전거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도전'이란 표현을 한 건 제주 내륙 혹은 중산간 길을 겨울철에 횡단하는 자전거 여행자를 찾아보기 힘들어서다. 여러 중산간길 가운데 선택한 곳은 1112번 지방도로로 '비자림로'라고 불리는 길이다.
* 자전거 여행길 : 구좌읍 평대리 해안도로 - 1112번 지방도로 - 비자림 - 송당리마을 (게하 1박) - 아부오름 - 산굼부리 - 삼다수목장 - 사려니숲
제주섬 동쪽 구좌읍 해안도로를 달리다 저멀리 제주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이 보이는 1112번 도로로 들어섰다. 이 도로는 비자림로라고 불릴 정도로 우람하고 키가 큰 삼나무들과 소나무 숲이 길 양옆에 길게 도열해 있다. 이런 장관의 숲길을 달리게 되다니 마음은 설레고 다리에서 힘이 불끈 솟는다.
겨울철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도 드물고 제주 해안가라면 종종 마주치던 자전거 여행자는 아예 보이질 않는다. 게다가 중산간 곳곳에 놓여있는 눈 쌓인 무덤들과 신령스럽게 들려오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는 여행자를 더욱 고독하게 했다.
얼마동안을 혼자 그렇게 달렸을까 저 앞에서 스쿠터를 타고 저속으로 다가오는 초로의 아저씨와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 "안녕하세요!" 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묘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휙 지나쳤다고 생각했던 아저씨의 스쿠터가 곧 유턴을 하더니 내 자전거 옆으로 다가와 어디를 가냐고, 길은 알고 가느냐고 걱정을 해주신다.
에베레스트와 낭가파르바트라는 거대한 산을 혼자서 그것도 무산소로 올라간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독일사람은 고독에 흰고독과 검은 고독이 있다고 했다. 겨울날 인적드문 제주 중산간길을 홀로 달려보니, 나도 그처럼 고독에 대해 고독의 여러 양상에 대해 말할 수 있겠구나 싶다.
비자림로에 자리한 구좌읍 송당리 마을은 '오름의 왕국'이라고 별칭을 지닌 동네이기도 하다. 영화 <이재수의 난>의 촬영지였던 아부오름, 비자림의 뒷동산 돝오름, 독특한 문양이 보이는 손지오름, 매년 마을제를 여는 당오름 등 수많은 오름이 마을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구멍이 숭숭 뚫린 까만 돌담, 제주의 독특한 막대기 대문 정낭, 대문 없는 집 등 제주의 진경을 느껴보기 좋은 곳이다.
제주는 옛 부터 죄를 짓게 되면 엄하게 다스려 똑같은 죄를 짓게 하지 못함으로써 치안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둑 들 일이 없게 되었고 그 결과 담벽은 낮아지고 대문은 사라진 풍경이 된 것이다. 송당리 마을도 집에 돌담만 있지 대문이 없는 동네다. 대문이 없으니 초인종도 필요 없다. 낮고 까만 돌담은 여기가 내 집이요 하는 표식일 뿐이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 혹은 소울 플레이스(Soul Place)로 삼기 좋은 마을이었다. 사실 제주 여행의 참다운 맛과 멋은 유명 관광지에 있지 않다. 섬에서 만난 곳 가운데 감성이 묻어나고 기억에 오래 남는 곳은 많이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라 지극히 '비관광지'인 곳들이 많다.
마을 입구에 마을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 하루방과 할망이 해학적인 표정을 지으며 맞아준다. 육지의 시골마을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장승격으로 그 표정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와 닮아 볼수록 정이 가고 눈길을 끌었다.
마을에서 숙박을 하며 알고 보니 이 돌상은 남신인 '소로소천국'과 여신인 '백주또상'이라는데 이름이 참 독특하기도 하다. 무속신화가 그 뿌리이기도 한 마을신화의 주인공인 이 수호신 주위에서 송당리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정월 13일(양력 2월 중순)에 송당 마을제를 연단다.
보통 시골동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면 다음 날 아침 닭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잠을 깨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상상도 못한 까마귀들이 노니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동네가 중산간 지역에 있다 보니 제주 산간지역에 주로 사는 까마귀들이 흔하다. 그런데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요상하게도 여러 가지로 들려온다. 까악까악 소리 높여 외치다가 자기네들끼리 꾸륵꾸륵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화에 나오는 새이니 만큼 영물이긴 영물이다 싶다.
송당리를 지나자 비자림로 주변 오름들이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낸다. 지난밤 내린 눈이 하얗게 쌓인 덕택이다. 칡오름, 돔베오름, 산굼부리··· 오르기 편하고 부드러운 능선이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하는 아부오름에 올라가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원초적이고 야성적이며 마음을 흔드는 풍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춤을 추며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억새들과 오름 주변에 흔히 자리한 무덤들도 잊기 힘들다. 둥그런 오름 아래 옹기종기 자리한 무덤들은 죽음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 편안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10여분 걸어 정상에 올라서니 주변 풍경들과 오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거칠기 그지 없었던 바람은 이제야 친근하게 나를 툭치고 밀친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간 사이의 한줄기 도로는 내가 과연 저 길을 달려 왔는지 실감이 나질 않게 희미하다. 눈 내린 오름 비탈면을 노루 한마리가 날아가듯이 뛰어가는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게 된다.
오름 밑 초원, 삼다수 목장 등에서 방목중인 말들은 내가 탄 금속말의 출현에 놀라는 기색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갈기를 휘날리며 묵묵히 서있다. 말들의 무리를 가까이에서 바라보자니 나도 저 들판에서 말들과 함께 무작정 달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샘솟는다.
비자림로의 끝에 자리한 사려니숲 가는 길, 키가 크고 장대한 삼나무 숲이 길 양편에 도열한 모습이 장관이다. 내내 감탄을 하며 달리는데 차분했던 겨울바람과 부드러웠던 눈발이 갑자기 180도 돌변했다. 바람이 불적마다 몸은 휘청이고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어찌나 크고 생생한지 바람이 귀에 대고 함성을 지르는 것 같다.
거친 바람에 실린 눈발은 썬글라스를 순식간에 덮어버려 자꾸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천천히 내 옆을 지나가던 차안의 어떤 이는 창문을 열고 휴대폰을 꺼내더니 눈발 속을 기다시피 달리는 나와 자전거를 찍어댔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달렸을까 아니 엉금엉금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하지만 눈이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 날씨 속에서도 그리 춥지 않았다는 것만은 내 기억 속에 오롯이 새겨져있다.
이날의 추억으로 사무치게 춥고 시린 겨울이 찾아올 적마다 제주의 겨울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있다는 것은 자연이 내린 축복이다. 우리 영토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고 제주도가 없다면 그 허전함과 서운함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었을까…. 눈 내리는 겨울날의 제주 자전거 여행은 비록 무모했지만 그래서 더욱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