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

성역을 존중받고자 하는 당신을 위하여

by Cactus

나는 그 길이 좋았다.

안암동에서 동대문까지, 기나길길에서 펼쳐지는 삶의 향기가 좋았다. 수업이 끝나 삼삼오오 나오는 고등학생들, 땅콩 냄새가 솔솔 풍기는 숭인동 땅콩가게. 가판대에 색색깔의 액세서리를펼쳐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물건을 파는 아저씨, 오토바이에 한 가득 짐을 싣고 달리는 상인들. 수업이 끝나고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은 나의 대학생활의 낙이었다. 아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만난 지 얼마되지 않은 그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그 길 혼자 걷지 마, 나랑같이 걸어. 너 혼자 너만의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게 싫어.


이해는 갔다. 그러나 '위협'을 느꼈다. 사랑은 동행이고 연인은 동행자라 한다. 그러나 동행이 나의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흡수하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일까. 깊은 관계란, 서로의 사적 성역을 반드시 무너뜨려야만 하는 성질의 것일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성'이 있다. 사람들은 그 성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지친 몸과 맘을 충전한다. 행복을 얻으며 영감을 찾기도 한다. 노인과 바다라는 대작을 남긴 작가 헤밍웨이에게 사적인 성역은 고요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였다. 그는 단골카페에서 홀로 따뜻한 차를 마시며 포근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글감의 원천이라 말했다. 다나베 세이코의 책 '아주 사적인 시간'에 등장하는 노리코에게 사적인 성은 그림이다. 물고기만 그리는 한 친구의 그림전을 구경하고 무언가를 흰 도화지에 그려넣는 순간, 그의 삶은 위로를 받는다. 능력은 동생보다 더 출중했으나 여성이란 이유로 음악을 할 수 없었던 모짜르트의 누나 나넬은, 괴로울 때마다 홀로 방에 들어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저마다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사적인 성역은 그들을 위로하고 채워주며 강하게 만든다. 그 곳은 방해 받고 싶지 않은은신처이자 탈출구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순적이다. 자신의 성역을 보호받고자 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성역을 들여다 보려한다. 개인의 사생활은 중요한 것이지만 타인의 사생활은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상태의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만 진정한 사랑이며, 친밀이며 소유라믿는다. 진정 오래가는 연애란 흡수나 변화에서 오지 않는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성역을 존중하는 동행, 양립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것을 함께하고자 하는 과분한 욕심은 흡수와 변화를 요하는 권력이자 공포다. 나의 사적인 성역을 존중하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바꾸려는 그의 위협이 오히려 우리를 분리시킨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결국 나는 그와 헤어졌다. 나의 모든 성역을 인정하지 않고, 내 모든 것을 보는 것이 동행이라고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노리코가 그의 그림을 찢어버린 남편 '고'를 두려워하며 이별을 선언했듯, 나넬 모차르트가 자신의 편지를 본 아버지에게 대노했듯.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나는 나의 사적인 성역을 존중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 권력이 아닌 동행으로 발을 맞추는 사람과, 서로를 존중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나처럼, 나의 사랑도, 세상의 모든 위협자들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모두가 권력이 아닌 양립과 동행으로 관계를 맺는,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성역을 존중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2011년 7월, 신촌의 어느 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