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있는 침대에서 피어나는 동료애
‘난자 채취’라는 시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섭다고 꽥꽥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생 때였는데, 당시엔 어떻게 바늘로 난자를 채취할 수 있는지 상상이 안갔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채취를 한다. 소름돋고 무서운 채취를.
과배란 주사를 이주 쯤 맞았을까. 의사선생님이 ‘난포가 잘 자라고 있으니 4일 뒤에 난자를 채취하시지요’라고 말했다. 초음파 상으로 6개 정도의 난포가 보인단다. 입원해야 하나요? 많이 아픈가요? 아뇨, 입원은 안합니다. 마취하고 푹 주무시면 시술은 끝나있을 거예요. 채취 후 회복실에서 조금 누워있다 나가실 거고요. 난자를 많이 채취하시는 분들은 복수가 차서 힘들어하시는데, 00님의 경우엔 많이 채취하지 않으니까 복수는 차지 않을거예요. 선생님은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나는 두렵기만 했다. 난포가 6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진짜 난자 채취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채취일로 넘어가는 밤 12시부터 금식을 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맞춰 신랑과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시술실인 3층으로 올라가자 대기석에 남자들이 쭉 앉아있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고작 아침 9시인데 말이다. 새삼 느끼지만 우리나라 출산률이 낮다고 하는데 난임병원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
간호사가 내이름을 불렀다. 여기서부턴 신랑과 헤어져 나 혼자 들어가야 한다. 잘 다녀올게. 신랑과 눈인사를 나눴다. 든든한 신랑. 잡았던 손을 스르르 푸는 순간, 이제 내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구나, 두려움이 앞섰다.
환복을 하고 반층 위로 올라갔다. 작은 환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멀뚱멀뚱 티비를 보고 있는데, 한 간호사가 와서는 내 손등에 바늘을 꼽았다. 어, 내가 지금까지 다양한 수술을 하며 마취바늘을 꼽아봤는데 말이지, 이 바늘은 장담컨대 내 인생 최고로 아팠다. 내 손등 가장자리에 왕바늘을 수직으로 딱 꼽은다음 한껏 비트는 그 고통이란! 사실 비틀었다는 표현은 좀 과장했다. 그러나 당시 내 고통을 떠올려보면 바늘이 내 얇은 손등 살 속에서 한 10번은 헤집은 것 같았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간호사가 나에게 간이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했다. 언제까지 대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신이 나가있을 땐 병원 커튼에 있는 무늬 갯수를 세는 게 제일이다. 천장에 지렁이 갯수를 세도 좋고. 하나, 둘…
000 교수님한테 이식받으시나요?
옆침대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예? 예…
이번이 처음이신가봐요.
예…
저는 처음이 아니예요. 채취가 처음엔 무서운데 하다보면 또 별거 아니더라구요.
아, 예…
우리 잘 되어서 만나요.
예…
지렁이를 몇개 셌는지 까먹어버렸다. 그래도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긴 하다. 저 분은 몇번이나 경험했기에 여유롭게 인사를 나누는 걸까.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굴욕자세를 취한 채로 수술침대에 누웠다. 주치의 선생님과 눈인사를 하고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깨보니 눈 앞에 간호사가 있었다.
000님 정신이 드세요? 난자 (9개) 채취되었어요.
간호사는 저 9개를 소리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9개’라고 쓴 글씨를 보여줬다. 아마도 바로 옆에 채취한 환자들이 누워있으니, 서로 난자 채취 갯수를 비교하지 않도록 배려한 개 아닐까. 라고 나는 추측했다.
간호사는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 것, 휴식을 취할 것, 등등 주의사항을 알려줬고 나는 옷을 갈아입은 뒤 수술방 밖으로 나왔다. 그 뒤엔 신랑의 얼굴, 차체의 작은 흔들림에도 속이 요동치던 아랫배가 생각난다.
선생님 얘기처럼 복수는 차지 않았지만 왠지 남들 하는대로 해야 할 것 같아 복수를 없애준다는 포카리스웨트를 벌컥 벌컥 마셨다.
난자가 많이 채취되면, 좋은 수정란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 좋은 수정란이 많으면, 높은 퀄리티가 요구되는 ‘냉동 수정란’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냉동 수정란이 생기면, 그대로 보관했다가 다음 시험관 때 해동해서 별도의 난자 채취과정 없이 수정란 이식을 할 수 있다.
고로 난자가 많이 채취되면 아주 좋다.
하지만 나는 이 기대감을 버려야했다. 남들은 20개씩도 채취한다지만 나는 고작 9개를 채취했으니까. 게다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9개 중 신랑의 정자와 정상적으로 수정된 수정란은 6개 뿐이었고, 내 몸에 이식한 2개 외 나머지 4개는 냉동되지 못했다.
그래. 원래 내 인생에서 쉽게 되는 건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이식일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