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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칵테일 Jul 17. 2020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

부모에게 받은 트라우마.

삶은 물컵이다. 컵에는 다양한 경험, 생각, 감정이 담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따듯한 물은 가볍게 삼켜 몸에 필요한 양분으로 저장한다. 거북한 물은 따라내 버린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한 컵 유지를 위해 애쓴다. 건강한 삶을 살고픈 이들의 노력이다.


때로는 컵에 들어온 물이 너무 뜨겁거나 차가울 때가 있다. 무시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이는 자신의 의지로는 피할 수 없는 경험들이다. 작게는 부모의 꾸중, 소소한 차별, 좌절이다. 크게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폭력, 혐오와 배제, 전쟁 등이다. 시나브로 컵 속에 쌓인 감정은 조금씩 사람들의 삶을 흔들며 트라우마가 되기도 한다.

겹겹이 쌓인 트라우마는 컵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 버린다. 쌓이면 쌓일수록 컵의 깊이는 얕아진다. 그래서 컵이 차기 전 쉽게 처리하던 감정을 점점 다루기 어려워진다. 이미 가득 찬 컵은 다른 감정을 해소할 여력이 없다. 넘치는 감정은 쉽게 폭발하고,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본다.


내 컵에도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부모님은 계획에 없던 나를 낳았다.  엄마의 커리어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빠는 양육에 무심했다. 하루빨리 부모님이 이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양육에 대한 책임보다 본능에 더 충실했다. 두 명의 동생이 더 태어났다.


“제가 부모를 고소했어요.”

“왜 고소했죠?”

“저를 태어나게 해서요.”


영화 <가버나움>에 나오는 대사다. 생계를 위해 여동생을 팔아 치워 죽음에 이르게 한 부모에 대한 원망이다. 책임질 수 없는 아이를 더는 낳지 말라는 절규였다. 나는 주인공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내게 가장 큰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축복받지 못한 탄생, 가정불화, 아버지의 죽음, 크고 작은 좌절을 겪으며 내 컵은 점점 더 얕아졌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바닥을 드러냈다. 희망 고문에 시달리기보다는 쉽게 포기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게 마음 편했다. 인내심도 마찬가지였다. 자극적인 실화를 다룬 TV 프로그램 속 불행은 나를 더욱 미치게 했다. 작은 자극에도 온종일 기분이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피부에 난 흉터 치료를 위해 흉터 조직을 절제 후 다시 봉합하는 과정이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다시 한번 상처와 맞서는 모습. ‘어쩌면 트라우마라는 상처를 지닌 내게 필요한 치료 방법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내면의 상처와 맞서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피부가 재생돼 흉터가 사라지듯 트라우마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까? 아프겠지만 다시 한번 불편한 기억을 끄집어내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 싶어졌다. 딱딱한 트라우마를 흘려보내고 물컵을 다시 넉넉하게 만들고 싶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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