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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칵테일 Nov 23. 2020

인간으로서의 책무

김민식 MBC PD의 칼럼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읽었습니다.

10일 자 한겨례 오피니언 코너에 실린 김민식 PD의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는 글을 읽었다. 정말 여러 번 놀랐다. 그는 어머니의 폭력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김민식은 한낱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말하기 위해 과감히 어머니를 전면에 앞세운다.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은 지식인이다. 그런데 말싸움을 하면 어머니는 지적 우월감을 이용하여 아버지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아버지는 욕과 손찌검을 하고 어머님은 끝끝내 비참해졌다. 지식인의 책무도 아니고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다하지 못해서 어머니는 맞은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지식인의 '진짜' 책무는 어머니의 오랜 폭력 피해보다 중요하다. 그는 폭력 사건에 자신은 한발 물러서 있다고 착각하며 그 사건에 대해 평가와 판단을 거듭한다. 


나는 도대체 지식인의 진짜 책무가 무엇이기에, 도대체 무엇이기에, 어머니를 이토록 잔인하게 소비하는지 궁금했다.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는 것은 그의 글 마지막 문장에 등장한다.


" 책을 읽어 내 자존감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자존감을 존중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그것이 지식인의 진짜 책무다 "


그렇다. 고작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아름답지도 이롭지도 새롭지도 않은 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사건의 목격자로서 고작 이것을 말하기 위해 과감히 어머니를 처벌한다. 거침없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꾼다. 타인(= 아버지)의 자존감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손찌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가정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인 어머니'에게 돌린다. 폭력은 어머니가 제공한 것이고 그에 따른 현상이 '아버지의 욕과 손찌검'이다. 목격자이자 아들로서 그리고 남성으로서 그는 거침없이 어머니를 단죄한다. 그에게 '우리'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본인의 영역에 편입시켜 어머니와 대립되는 구도로 글을 적었다. 사건을 뒤틀며 오히려 피해자 - 가해자의 입장을 바꾸어 버린다. 그들에게는 어머니가 가해자이다. 과거에 우리는 폭력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폭력 피해자를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들'로 명명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목도했다. 이는 현재 폭력 가해자들의 윤리적 판단 결여에 기여했을 것이다. 여전히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 말싸움 끝에 아버지가 욕을 하거나 손찌검을 하며 어머니는 끝끝내 비참해진다 "


이 문장이 참 슬프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자기만의 방』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왔다"라고 말한다. 거울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한 여성은 어떻게 되는가? 남성의 모습을 두 배로 확대하지 못하고 있는 대로 보이게 하면 무슨 일이 펼쳐지는가? 김민식 PD는 끝끝내 비참해진 어머니를 통해 그 답을 말하고 있다. 


김민식 PD는 젠더를 삭제하여 개인적 사건으로 축소했다. 폭력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일상적인 사건으로 의미를 축소-은폐한다. 젠더폭력을 폭력이라고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폭력은 명백히 아버지가 저지른 것이며, 지식인의 진짜 책무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우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글 속에서 소비되지 않고 화자로서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기를 기대한다. 그간 폭력사건을 일상화, 사소화 해버리는 시도들로 인해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김민식 PD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김민식 PD가 글을 통해 재현했듯이 "맞을 만하니까 맞았다"는 수많은 폭력 가해자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사회 속에서 울리고 있다. 


그들의 소리가 얼마나 큰지 피해자가 겪는 고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레슬리 제이미슨은 『공감 연습』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이 고통받는 정확한 지점을 인식하는데서 공감은 시작된다. 정확한 인식이 곧 위로이다. 그들의 고통을 묻히게 둬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결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가해자의 서사보다는 피해자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공감은 ... 그것은, 고난을 빛 속으로 끌어와 눈에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감은 자기 시야 너머로 끝없이 뻗어간 맥락의 지평선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는 가정폭력 생존자를 대상으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생존자 '임 작가(활동명)'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4년여간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녀야 했던 경험을 '파티룸 302'란 곡에 담았다. 


천장 벽지 위에 구름을 그려

나의 지붕이 곧 하늘이야

내가 누운 곳이 나의 집이요. 


가해자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주변에 머물러 있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공간을 내어주자. 인간이라면 진짜 인간이라면 피해자에게 이 폭력의 책임이 있지 않냐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처벌하자. 폭력 피해자를 대상화하고 탓하는 문화는 폭력 행위에 일조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변두리로 몰아간다. 김민식 PD의 글에 나타난 그의 자의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다. 사회는 더 이상 피해자에게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고, 피해자에게 사건의 원인을 전가하는 행위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김민식 PD가 지식인의 진짜 책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타인에 대한 존중'은 피해자에게 우선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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