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숨이 막힐 정도로 치열하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않다. 경쟁도 이런 경쟁이 없다.
간신히 경쟁에서 살아남은 혹은 버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생존자이다.
생존자들은 목소리를 낸다. "회사안은 전쟁터이고 밖은 지옥이에요!!"
부모들은 아이가 걱정된다.
우리의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 아니? 살아남으려면 공부해야 해!"
"최고가 아니면 소용없어"
하지만 배우는 속도는 배워야 하는 양을 감당하지 못한다.
언제나 기준은 나의 역량 그 너머에 존재한다.
모순이다.
부모들이 이야기하는 공부는 부모들이 '살아남은' 생존 방법이다.
그런데, 지금의 위협은 그들의 위협과는 다르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 높은 각성수준, 극단으로 치닫는 탐욕지수..
서울대생의 태반이 우울증을 앓고 있고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지도 않는 공무원이 되려고 청춘을 보내는 청년들이 즐비하다.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자축할 수 없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실패자가 아니라며 구분짓기를 시도하지만
실패에 대한 내재화된 혐오일 뿐 누구도 안전하지 못하다.
성과지표를 만들어 사람들을 쥐어짜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성과가 낮아진 사람에게는 외부적, 내부적 고통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성과가 낮은 사람을 가차없이 처벌하는 문화는
조직 내부 구성원에게 불안도를 높이는 기능을 한다.
각성을 불러오겠으나 높은 수준의 각성은 생산성을 저하한다.
따라서 성과가 낮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문화가
조직 문화의 각성을 낮추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살아 남는 것 그 너머를 보고 싶다.
살아 남는 것을 이겨내 '살 만한 삶'을 사는 것.
충분한 이완을 불안없이 감내하는 삶.
불가능 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렇기에 더욱 도달하고 싶은 내가 이루고 싶은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