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크나우 이야기 (3) 제국의 흔적
그래도 모처럼 멀리 나왔으니, 하루는 시간을 내어 이곳의 유명하다는 유적지를 둘러 보기로 했다. 러크나우는 우타르 프라데쉬의 주도(州都)로 나름 규모가 상당한 도시이다. 우타르 프라데쉬 주에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힌두의 성지 바라나시 등등 인도 하면 바로 떠오르는 관광 도시들이 있다. 오히려 거기 묻혀 러크나우는 우리에게 조금 낯설다.
러크나우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사실 관광에 별 관심도 없었으나 NGO 사무실에서 일하는 인도인 직원 부부가 기꺼이 동행을 자처해 주어 어영부영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근면하고도 싹싹한 성격으로 보였다. 남자는 코를 찡긋거리며 자기를 재연이라고 불러 달라 말했다. 인도 이름을 발음하면 '재연'이라는 한국 이름과 비슷하다며. 재연은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가이드 노릇을 톡톡히 했다.
드넓은 무굴 제국의 한 갈래였다는 어느 도시 국가. 어느 해인가 무진장 흉년이 들었더란다. 사람들은 배가 고프고 일이 없어 왕에게 호소했다. 왕은 고민 끝에 일자리를 고안해 냈다. 낮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서 건물을 짓고, 밤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 건물을 허무는 것을 무한정 반복하여 완공한 건물. 일종의 뉴딜 정책인 셈이다. 그야말로 창조 경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이, 우리가 방문한 “바라 이맘바라(Bara Imambara)”였다.
한쪽에는 모스크, 다른 한쪽에는 큰 궁과 법정으로 이어진 건물이 있다. 사실 입장료는 모스크가 있는 작은 건물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재연은 부지런히 다니며 하나하나 다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더운 날씨에 지쳐버린 우리는 제일 먼저 들어간 법정 건물에 들어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햇빛 쨍한 날씨에도 건물 안은 한결 선선한 기운이 돌았고, 중간중간 무척 시원하다 못해 동굴 속처럼 오소소 소름이 돋는 곳도 있었다. 더운 날씨를 피하기 위해 그렇게 설계된 거라고 했다.
매력적인 건물이었다. 이런 건물들이 으레 그렇듯 비밀 통로가 많았다. 비상시 왕이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통로였다. 재연은 궁수가 숨어 있던 공간도 보여 주었다. 그곳의 작은 창문은 정문과 일직선을 이루는데, 궁수는 정문으로 들어오는 이를 바로 볼 수 있지만 정문에서는 궁수를 볼 수 없는 구조라고 했다. 침입자가 오면 바로 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특이하게 건물 천장에도 복도가 붙어 있었는데, 조각도로 고무 판을 파는 것처럼 천장 벽을 주르륵 파서 그 안을 검게 칠해 장식해 놓았다. 재연은 원래 그 자리마다 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영국군이 침입해 왔을 때 금이란 금은 악착 같이 다 파 갔다고. 식민지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답게 우리는 혀를 끌끌 차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의 저쪽 끝에서 종이만 파삭거려도 반대쪽에서 들을 수 있었다. 재연은 몸소 왔다 갔다 하며 우리가 볼 수 있게 도와 주었다.
물 탱크도 마찬가지였다. 소리가 울려 어디서 작은 돌 하나만 떨어뜨려도 그 소리를 쉬이 들을 수 있다. 물 탱크로 들어오는 계단에 누군가 들어서기만 해도, 물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물에 비친 사람을 바로 볼 수 있어 즉각적인 방어가 가능했다.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다양한 시스템이 왕을 철통 같이 방어하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중국 자금성에는 나무를 심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자객이 숨을 수 있는 곳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그런 걸 보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를 외치던 조선의 언론 시스템은 왕권에 상당히 위협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민주적이었네. 아무튼... 그렇게 동양의 고궁 대다수에는 왕을 지키기 위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시스템이 촘촘하게 짜여 있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왕을 얼마나 세심히 지킬 수 있었을까? 나는 이 나라의 끝이 궁금했다. 영국군이 금을 파 가기 직전, 그 왕은 어느 길로 도망칠 수 있었을까?
재연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왕은 도망치지 못했다고 했다. 아니 왜? 이렇게 비밀 통로가 많은데? 의문에 빠진 우리 얼굴을 보고 재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궁인들이 다 도망가서, 신발 끈 매 줄 궁인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왕은 최후의 권좌에서 적을 맞이했다고.
그게 그 나름의 권위 의식이었겠지만... 동서고금 막론하고, 아무리 인프라가 좋아도 나라 망할 구멍은 다 생기는구나 하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바라 이맘바라를 떠났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생각보다도, 다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바라 이맘바라를 나와 이동하는데, 그 일대의 길들은 다 아주 오래 이슬람 왕조들의 치하에만 있던 길이어서 힌두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아랍권 나라의 길을 지나간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만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처럼 오랜 제국의 통치는 지금까지 그 흔적이 생생해, 그 끝이 그토록 허무했다는 게 더욱 믿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입만 열면 누누이 강조하시던 유종의 미... 그 목소리가 크고도 잔잔하게 마음에 울렸다.
이윽고 재연이 바지런하게 우리를 데리고 움직인 곳은 시장이었다. 러크나우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치칸'을 사기 위함이었다. 치칸은 무굴 제국에서부터 기원을 두고 내려오는 러크나우 특유의 자수 양식으로, 러크나우의 많은 무슬림 여자들이 집에서 '한 땀 한 땀' 수놓아 옷, 손수건 등의 직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원래는 그렇게 만들어내면 세상에 하나뿐인 옷이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리가 들어간 시장에만 봐도 같은 옷이 엄청 걸려있는 걸로 보아 장인의 자존심보다는 생계 유지 수단이 되어 있는 듯싶었다.
고민고민 하다가 기념품 삼아 옷 한 벌을 샀다. 빨간 옷 소매에도 밑자락에도 서로 모양이 다른 자수가 빼곡했다. 손에 옷 한 벌을 들고 기분 좋게 시장을 나왔을 때, 재연의 아내가 비닐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치칸으로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었다. 받기만 한 상대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까지 받다니 뭉클하고 고마웠다. 나중에 열어 본 상자에는 손수건 세 장이 돌돌 말려 있었는데 손수건 하나하나 안에 고정하는 심지 대용으로 아이들이 시험 보고 공부한 공책 한 페이지가 들어 있었다. 쉬이 그려 볼 수 있는 어느 집의 풍경을 마음에 새겨 보며, 러크나우를 떠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NGO 사무총장님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기만 했을 뿐인데 벌써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또 훅 더위가 끼쳐 왔다. 그러나 그 남부의 더위에 지칠 틈도 없었다. 내가 살던 도시로 돌아오기 무섭게 사무총장님과 현지 스태프들이 만나 회의를 하고 계획을 짜며 본격적인 연결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갔고, 우리는 그렇게 아동 후원 준비를 시작했다. 한여름으로 조금씩 접어들어 가는 계절, 최선을 다해 문서에 매달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달을 보냈다. 2014년 3월과 4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5월이 오고 있었다. 휴가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