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크나우 이야기 (2) 슬럼
러크나우 '여행'이 아니라 NGO 사무총장님의 출장을 따라 간 '견학'이었던 만큼, 불과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보통 관광객이라면 도저히 못 보았을 것들을 많이 보았다. 도시 겹겹이 쌓여 있어 그 베일을 하나하나 들추어야만 볼 수 있는, 깊은 곳. 이미 그곳을 찾아다니고 리서치하며 열심히 일을 하신 분들 덕분에 나는 힘 들이지 않고 그곳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곳은 슬럼(slum),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한 지역"으로 정의되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 슬럼을 가 보면 그 정의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곳에서는 가난이라는 말로 담기지 않는 궁기가 묻어난다. 내가 느낀 대로 슬럼을 정의하면, "다른 이들이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여겨서 버린 것들을 더덕더덕 붙여 이어가는 불안한 삶의 현장"이다. 그 동안 나도 다양한 가난의 면면을 보았다. 쌀 떨어지는 일이 예삿일인 집, 움막집, 건설 현장에서 완공까지 야간 경비로 일하는 동안 살기 위해 임시로 비닐을 쳐서 만든 집 등 다양한 형태의 가난한 집을 많이 가 보았지만... 슬럼에는 보통의 가난과 다른 차원의 가난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슬럼의 형태가 생각보다 꽤나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주워다 집을 엮고 살다가, 그런 집이 주변에 늘어나면서 슬럼이 되는 게 아닐까-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곳도 있지만 다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 슬럼은 주로 강가나 기찻길 등 정부 소유의 땅이지만 개발될 일은 잘 없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생기는 슬럼들이다.
사유지에 계획적으로 만든 슬럼도 있다. 거주민들이 땅 주인에게 자릿세를 내고 집을 직접 엮어 사는 형태였다. 어떤 슬럼이든 슬럼 안에서도 가난의 격차가 있고, 구멍가게가 있고, '이 구역은 내가 잡고 있다' 하는 실세가 있고, 심지어 매춘도 있었다. 인도에 오기 전 부러 시간을 내어 읽었던 <안나와디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볕에 드러나 있는 살갗을 햇볕이 따끔따끔 깨무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씨였다. 그런 더위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슬럼에서 슬럼, 슬럼에서 또 슬럼으로 왔다 갔다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금이 고작 봄에서 초여름쯤 된 계절이라는, 다가올 한여름이 아직 한참 남았다는 사실에 나는 더 힘이 빠졌다.
내가 러크나우를 방문하던 그때는 3월이었는데, 봄의 기쁨을 알리는 홀리(Holi)라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시장마다 물감 가루와 물총을 쌓아 놓고 팔고, 그걸 섞어 서로에게 쏘며 신나게 노는 축제였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 모두 다양한 색으로 얼룩덜룩해져 다니는 기간이었다. 모두 다 같이 즐기는 신나는 행사고, 인도 여행의 낭만처럼 다뤄 놓은 글도 인터넷에서 좀 보긴 했지만... 사실 조심해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한 번 물감 가루가 묻으면 그 옷은 버려야 하고 피부에도 며칠 물이 든 채로 다녀야 하기도 해서 그런 의미로도 조심조심 다녔다. 그득 쌓인 물감 가루뿐 아니라 길 군데군데마다 밤에 태울 꽃과 장작 더미가 잔뜩 쌓여 있어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기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밤에 사람들이 그 장작을 태우기 시작하면, 가능성일 뿐이지만 혹시나 위험할 수도 있었다. 술에 취해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는 힌두 극단주의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외국인이 괜히 얼씬거리다가 집중 포화를 받을 수도 있고, 축제 분위기에 흥분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항상 축제의 열기보다 먼저 생각했다.
슬럼에 들어가는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축제 분위기에 취한 이들의 얼큰한 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온도였다. 어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은 거의 적대감에 가까웠다. 고까운 눈이 반가울 리는 없지만, 내가 진짜 신경 쓰인 건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었다.
낯선 외국인을 보면 보통 대부분의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까이 다가오거나 아니면 멀리서 눈치만 보며 뻣뻣하게 굳어 있거나 한다. 아이 성격에 따라 가까이 올 수도, 절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를, 외국인을 낯설고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신기하게 여긴다. 외국인을 제법 많이 본 아이들도 웬만하면 그랬다.
그런데 슬럼에서 만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시한부 인생이라도 선고받은 사람들처럼 허공만 멍하니 보고 앉아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나가는 우리를 쳐다보는 아이들도 있긴 했지만, 외국인을 신기하게 보거나 궁금해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거울처럼 그냥 내가 그 시야에 비치는 것뿐, 생기라곤 없는 그 눈이 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궁금해질 만큼. 길거리 지나가는 소나 닭을 보듯, 무심하고도 무심한 눈동자였다.
조금도 아이답지 않은, 이따금 한 줌의 경계마저 실려 있는 눈빛. 왜 슬럼을 빈곤층, 가난한 동네, 하는 식의 적당한 말로 표현하지 않고 슬럼이라는 별도의 단어를 만들어 칭해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슬럼에는 가난 위에 절망이 둘러진, 이 슬럼이 뒤집어지거나 슬럼을 빠져나가지 않는 한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층층이 쌓여 사람들의 생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NGO에서 몇 달 전부터 슬럼 학교를 시작했다는 곳으로 갔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학교라고 해 봐야 얼기설기 엮은 가건물에서 불과 두어 달 진행되었을 뿐, 이제 고작 가갸거겨 정도를 뗀 아이들이었다. 아직 사람을 만났을 때 뭐라고 인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라, 나를 보고 뭐라고 영어로 말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자기가 배운 유일한 영어인 A B C D를 줄줄 읊는 아이도 있었다. 배우면 얼마나 배웠고, 공부를 하면 얼마나 했겠나. 그러나 나를 쳐다보는 눈빛의 심지가 달랐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당당한 자신감이 있었다. 밝고 똘망똘망하게 자라고 있는 무언가의 새싹이 그 눈동자에 심겨 있었다.
나는 왜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하는지, 교육이 왜 그렇게 중요하다는 건지 비로소 피부로 이해했다. 지진이 나고 내전이 터지고 삶의 현장이 무너진 곳마다 왜 학교를 지어야 하는지, 우리가 힘을 모아 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이유들이 무엇인지 그 눈빛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교육은 소망이었다. 소망을 심는 일이었다. 소망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예쁜 말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소망이 있어서 아이들은 달라졌다. 세상 마지막 날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가만히 눈을 들어 무심하게 나를 보는 대신, 천방지축 나를 따라다니며 호기심이 양껏 담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는 이 아이들은 분명 교육의 산물이었다. 희망이 낳은 아이들이었다.
쉽게 변하는 건 없다. 그래서 “몇 년 아동 후원해 봤는데, 그거 다 애들한테 가기나 해요? 중간에서 다 꿀꺽하는 거 아니야?” 하는 시선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소망의 씨앗을 심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쉽게는 변하지 않겠지만 분명 변한다. 해당 지역 아이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고, 날이 갈수록 양질의 수업을 제공받으며 쑥쑥 자라고 있다. 그 후로 그 아이들을 다시 본 적은 없지만 그때보다 더 밝고 사랑스러운 눈빛일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절망의 절망, 그리고 거기서 캐낸 희망. 어쩌면 그 작은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한 눈빛을 잊을 수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