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꼭 좋은 일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조금만 비슷한 일이 생겨도 긴장하게 되는 그런 일들도 눈에서 멀어지면 서서히 마음에서 멀어져 갈 수 있다.
물론 트라우마나 플래시백은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 뚜껑 보고 놀랄 수 있고, 여전히 이어지는 아픔 속에 살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아픔을 다 어루만지면 하나의 역사로 굳어질 수도 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기가 쉬웠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다름을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관용의 색깔이 종종 사라지는 이 나라에서, 얼마든지 그 다름을 이유로 사람이 사람 취급 못 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할 얘기가 있으니 스태프들은 모두 모여 보라는 말을 듣고, 뭔가 잘못된 게 있었나 혼날 일이 있나 긴장하고 들어간 자리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 아픈 이야기를 우리는 들었다.
우리 아이 중 하나가 부모님을 하루 아침에 잃었다. 피살되셨다고 했다. 몇 번 뵌 적도 있는 그 얼굴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발견된 부모님의 시체는 반정부군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라 변두리에서 가끔 이런 억울한 의문사가 일어난다. 시골에서 험악한 소문이 들려온다는 말을 얼핏 듣긴 했지만 우리가 그 당사자 옆에 서 보니 그야말로 황망했다.
여태까지 늘 도와 주셨던 현지 목사님과 아이의 형이 급한 현안 몇 가지를 처리하는 대로 아이를 데리러 오시기로 했고, 그때까지는 아이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빠랑 통화하고 싶으니 핸드폰 좀 쓰게 해 달라고 몇 번이고 찾아왔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금은 통화 못 해, 나중에 하자.” 대답하고 돌아섰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밤중에 우리끼리 앉아 한국말로만 이야기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때 나는 제안을 하나 받은 상태였다. NGO 사무실과 현지 사업장과 이야기를 마쳐 9월 초에 떠나기로 하고 비행기 표만 끊으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현지 사업장에 있는 스태프들이 모두 비자 등의 이유로 몇 주씩 자리를 비워야 해서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이제 인도 생활을 마친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 나가다가 받은 제안이라 사실 내키지는 않았는데, 아이의 삶을 덮쳐 온 갑작스러운 재앙에 한국의 가족들과 이야기하여 조금만 더 남기로 결정했다. 사춘기를 맞아 가뜩이나 생각이 많은 아이가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어른들이 모두 왔다 갔다 바쁜 것보다는 한두 명이라도 집에 계속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의 말이나 행동이 그 아이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거란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가구처럼 벽처럼 매일의 일정처럼, 뒤흔들릴 아이의 세상에 평상시와 같은 어떤 것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떠날 때 마음이 조금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스리랑카 행이 결정되었다. 비자가 끝나기 직전이었으므로 비자를 다시 받아야만 했으니까. 정보를 알아보고 비행기 표를 끊고 루트를 정하며 준비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스스로가 어려웠다. 남들이 내게 부탁한다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의 작은 일이어도, 내 자신이 남에게 부탁하는 건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가장 좋은 시간대와 가격으로 비행기 표를 사는 것도, 안전한 숙소를 연결하는 것도 다 도와주시겠다는 손길이 있었는데... 내가 믿고 감사하는 어른들의 호의인데도 편하게 받지 못했다.
사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그런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결정해야 할 만큼 시간도 없었고, 생각보다 너무 비싼 스리랑카 물가에 맞춰 교통비, 숙식비, 비자 값까지 모두 해결할 만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스리랑카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직선거리로는 멀지 않지만 직항이 없어 굳이 인도의 다른 도시를 찍고 가야만 하는, 그래서 ‘이 정도 시간이면 한국도 가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긴긴 비행 끝에 닿은 곳이었다.
공항 모습까지는 괜찮았다. 괜히 새벽에 나가서 혼자 택시를 타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냥 공항에서 밤을 지새기로 했다. 그런데 어리둥절한 채로 걷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출구로 나와 버렸다.
노숙자들을 막기 위해 당일 비행기 티켓이 없으면 공항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공항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고, 이 한밤중에 혼자 시내로 발걸음을 떼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는 대합실에 앉았다. 기다리다가 지칠 때쯤 한쪽에 있는 간이 매점에서 커피를 마셨다.
인터넷에서 몇 번이나 본 ‘스리랑카 사람들이 순하고 착해요’라는 말을 너무 맹신한 게 잘못이었는지, 공항이라고 안심한 게 잘못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뭐 따지자면 사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아무튼 찰나였지만 성추행을 당했다. 청소부 할아버지였는데 자꾸 한쪽에 와서 눈을 좀 붙이라고 했다.
괜찮다고, 앉아 있는 게 편하다고 하는데 하도 잡아끌기에, 그리고 매점 구석일 뿐 별도의 공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 일이야 있겠나 싶어 그냥 애매하게 한두 걸음 따라간 것뿐이었는데 갑자기 내 품에 머리를 묻으려 들었다.
머릿기름 냄새가 역하게 훅 끼쳐 왔다. 화들짝 놀라 바로 떼어내고 가방을 챙겨 사람이 그득한 대합실로 내려왔다. 카운터 직원 하나와 그 청소부 할아버지뿐인 매점에 더 앉아있을 수 없었다. 인파에 묻혀 있어야 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긴장한 얼굴로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몸집만한 배낭을 매고 자유로운 영혼 같은 분위기를 폴폴 풍기는 백인 배낭여행객들과, 이따금씩 몰려왔다 이내 사라지는 중국인 단체여행객... 낯선 승려복을 입은 스님들과 머리를 가린 무슬림들... 갑자기 여기 나 같은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인도에서는 주변에 같이 일하는 한국인들도 있고 인도 사람들도 나를 동료로 가족으로 대해 주기 때문에 이렇게 철저히 이방인이 된 건 처음이었다. 긴장하고 떨리는 놀란 가슴이라 그런지 그 사실이 외롭고 허했다.
그러는 사이 새벽이 왔다. 미리 알아 둔 대로 버스를 타고 콜롬보 시내로 와서 오토 릭샤를 타는데, 도둑도 이런 날도둑이 없는 거다. 비록 처음 와 본 나라이긴 하나 오토 릭샤 타고 다닌 게 2년인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순식간에 뜯겨 버렸다.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가까스로 숙소에 도착해 나는 내일부터 좋은 시간 보내자고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선잠에 들었다.
다음 날 지리나 파악할 겸 동네 산책을 나가 볼까 하고 일층에 내려가니, 오늘은 선거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 만약을 대비해 집에 있는 게 좋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다시 올라갔다. 스리랑카도 내전에서 벗어난지 오래되지 않은 나라다. 선거 결과가 마뜩찮을 경우 사람들의 불만이 갈등으로 표출될 수도 있는지라 길도 모르고 정세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가급적 그런 자리에 가지 않는 게 제일 안전했다.
핀트가 안 맞는 게 이 여행의 특징인가? 급하게 끊느라 비행기 값도 얼마 차이가 안 났는데 역시 태국을 갔어야 했나, 하며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할 무렵 방콕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만약 태국으로 갔으면 딱 도착해 돌아다녔을 시간과 장소였기에 소름이 끼쳤다. 암만 생각해도 지금 이 선택이 최선이었는데, 눈 앞의 상황은 최선보다 최악에 가까웠으므로 나는 매우 절망스러웠다.
그러나 최악에서 시작했다는 건 이내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시선이 트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독한 첫인상에 앞으로 다신 오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던 이 나라는, 뜻밖에 정겹고 순한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디나 그렇듯 이 모습도 저 모습도 전부가 아니란 건 알지만... 아무래도 좋은 게 좋다. 매 순간이 끔찍한 여정과 일부만 안 좋은 여정은 분명 다른 거니까.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쉬는 날이 있더라도 주로 일기를 쓰거나 잠을 자거나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거나 하며 보냈다. 쉬는 날에는 내일을 살 힘을 비축해야 했으므로. 영화관까지 가서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큰 맘 먹고 해야 할 일이었다. 결국 끝끝내 인도 영화관 한 번을 못 가봤는데 여기 스리랑카까지 와서 영화관을 가 보는구나.
시간대 맞는 영화 중에 고를 만한 건 미니언즈뿐이었다. 이게 뭐라고 작은 성취감마저 든다. 이 여행에서 제대로 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그 바로 뒤가 기차역임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내일 다른 곳으로 놀러가기 위해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집에 가야겠다고 기차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한 부자(父子)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처음엔 그 빤한 시선이 불쾌하다 생각했는데, 그런 의도가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생각지도 않게 순수한 의도로 적극적인 '여행자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미리 리서치해 두었던 곳의 이름을 대자, 그들은 자기들도 역에 간다며 역까지 같이 가서는 역무원과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단박에 표까지 사도록 적극적으로 등을 밀어 주었다.
내일 갈 거였는데... 그렇지만 아주 가깝다고 하니 그냥 이참에 같이 가보기로 했다. 아예 내 표를 사 준다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사실 역무원이 영어를 했으므로 꼭 필요했던 도움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다. 이러다가 돌변해서 돈을 요구하거나 할 수도 있으므로 경계의 끈은 끝끝내 놓지 않았지만.
내일의 계획이 갑자기 오늘로 당겨졌지만, 뭐 이게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라 생각하며 엉겁결에 표를 샀다. 그 부자와는 행선지가 같은 게 아니라 방향만 같을 뿐이라는 것이 더 안심되고 좋았다. 자기들도 내게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은 못하는지, 낯선 사람이랑 말 섞지 말라고 진지하게 충고를 남긴 사람들. 수두 씨와 그 아들 쟈나타. 스리랑카에서 만난 첫 이름이다.
내가 미리 알아봐뒀던 곳은 마운트 라비니아(Mount Lavinia)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을 중심으로 근처에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많이 있다.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은 원래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 총독의 사저였다는데, 그 총독이 자기 환영 파티 때 춤을 춘 로비나라는 무희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지하 땅굴을 파서 매일 만났다고 한다. 그러다 총독은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돌아가서도 계속 로비나를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는 이야기.
돌아가기 전 자기 연인의 이름을 본따 살던 집을 “마운트 라비니아 집”이라 불렀다는데, 그 집이 호텔이 되고 지명마저 되어 버렸다. 마운트 라비니아는 콜롬보 시내에서 멀지 않아 나처럼 콜롬보 붙박이 신세인 관광객이 가볍게 다녀오기 좋다.
나는 메인 역인 콜롬보 포트가 아니라 밤발라피티야 역에서 출발했으므로 고작 세 역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기차라고는 하지만 역과 역 사이 간격은 우리나라 전철 정도 느낌이라, 콜롬보 포트에서 기차에 올라도 별로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짧은 거리가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다. 스리랑카의 기차는 해안선 바로 옆에 펼쳐져 있는데, 반짝거리는 바다를 눈에도 카메라에도 담으면서 감탄을 했다. 꿈꾸는 듯한 심정으로 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필름 감는 법을 순간적으로 잊은 탓에 좌르륵 풀려 나온 필름 한 통을 싹 버려야 했다. 밝은 햇살 아래 풀어헤쳐지는 필름을 보니 속이 상했다. 실수로 기차표까지 같이 버린 쓰레기통 안으로 다시 손을 뻗다가 뚜껑이 머리 위로 푹 떨어졌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진짜 아쉬웠던 건 순간의 실수보다는 내버려진 필름 쪽이다. 아이들 집을 방문해서 찍은 사진들과 스리랑카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을 필름이라는 게 속이 쓰리도록 아까웠다. 그러나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잊기로 꾸역꾸역 마음먹는다. 이미 저질러졌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미련을 빨리 버릴수록 속이 편한 법이니까. 그게 잘 안 돼서 그렇지.
역을 벗어나 호텔까지 걸어오는 그 짧은 길은 마치 시골 간이역 주변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워 아쉬움을 뇌리에서 금세 밀어내 주었다. 호텔이 아무리 좋다 하나 길과 바람, 나무와 햇살, 파도만큼 곱지는 못하다. 들뜬 마음으로 들어선 호텔에는 로비나 동상이 분수를 맞고 서 있다. 사랑의 대가가 오래, 참 지독하게도 가는구나.
물줄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봐서는 성녀처럼 천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본인이 저 모습을 본다면 저 천을 날려버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리진인지 리심인지, 두 편의 소설 사이에서 본명마저 묻혀 버린 그 인물을 생각했다.
사실 호텔 테라스에서 망고 주스나 한 잔 하고 오지 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두 씨는 굳이 리셉션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기 친구라고 미리 전화를 넣어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마운트 라비니아 호텔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유서 깊은 곳이니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
수두 씨 친구의 이름을 대고 기다리고 있는데 영 오질 않는다. 리셉션 사람들도 다 바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 오는 중이니까 잠깐만 더 기다리라는데, 긴긴 기다림을 감수하는 것도 내키지 않거니와 바쁜 사람 시간 빼앗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조금 고민하게 된다. 사실 이미 오고 있다고 하니 어차피 기다려야 할 건데. 내가 고민해서 답을 낼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왜 고민하는 걸까. 한숨을 쉬고 앉는다.
스리랑카는 이런 식으로 내게 여유를 가르친다. 잠깐의 비는 시간도 어쩔 줄 몰라하는, 어떻든 ‘내가’ 준비하고 ‘내가’ 노력해서 ‘내’ 주도대로 이끌고 가려는 나 자신을 보게 한다. 그게 시간이든 돈이든, 단순히 부족한 이유로 마음이 복잡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이끌고 주변이 따라오게 만들고자 하는 성격에, 남의 도움 받는 데에 너무 서툰 사람이구나. 민폐가 되기 싫어하는 마음이지만 어떻든 도움 안 받고 살 순 없는 건데, 받는 법도 잘 배워야 하는 건데. 그런 성격이 필요한 때도 있겠지만 과하면 좋을 게 없다.
나는 요즘 그렇게 다 내가 해야만 할 것 같은 무거움 아래 살았고, 그럼에도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다고 밀려가던 나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우리 집에 나보다 오래된 스태프가 없고, 사람들은 자연히 모든 일을 내게로 가지고 와 묻는다. 나도 물어봐야 하는 건 물어보는 걸로 넘기고,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답한다.
그러다 보니 일이 과중하기도 하거니와 내가 일을 끌고 가야만 하는 때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 가닥이 남아 스리랑카까지 오는 길에도, 와서도 뭐든 내가 다 하려 했다. 그러나 뭐 하나 맘대로 되는 게 없다. 덜그럭거리는 길에서 잠시 발을 멈추니 스리랑카가 내게 여유를 말하고 있었다.
이제 좀 갈피가 잡힌다. 이제야 마음에 불편하던 것들이 단어로 갇히고 덮인다. 잡았다. 언어의 사냥이 끝나야 문제의 해부가 가능해진다.
로비에 앉아 이 글을 끄적끄적 쓰는 동안 한쪽에선 무언가의 촬영이 한창이다. 가족 촬영인지, 웨딩 촬영인지 아니면 그냥 상업용 화보 촬영인지 모르겠지만 붉은색과 금색으로 덮인 사리에 둘러싸인 여자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덩달아 중국인 관광객들도 쉴 새 없이 그 여자를 찍기 바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에서 빵을 사고 있는 서양인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 또 여기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 카테고리로 잡히지 않는 나. 여기 없는 듯 홀로 있는 나.
흘러가는 그 안에 몸을 맡기는 법도 배워야 한다. 주도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할 수 있도록 대비하려고 빳빳하게 굴지 않아도, 괜찮다. 그때그때 닥쳐오는 일은 백 프로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으니, 어느 정도 준비했다면 때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해도 될 일이다. 예를 들면 떠나는 기차 시간을 모두 알아 두었으니, 5시 10분이나 5시 40분 기차를 타지 못하면 6시 10분 기차를 타도된다는 정도의, 작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유연성 말이다.
며칠 후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며칠 사이 미터기 가격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오토 릭샤 기사들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하늘을 찔러서, 당신을 어떻게 믿냐며 모난 눈으로 흥정을 하려던 참이었다.
자기는 미터기를 속이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던 아저씨였고 (물론 내가 그렇다고 그 사람을 믿지는 않는다.) 실제로 미터기도 정확해 보였는데, 문제는 요 며칠 잘만 찾아다니던 길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 나에게 있었다.
결국 이리저리 빙빙 헤매는 동안 미터기는 점점 올라가고, 나보다도 오토 아저씨가 그 상황을 더 안타까워했다. 오히려 내가 괜찮다고 아저씨에게 말해야 했다. “괜찮아요. 처음 온 사람인데 헤매는 게 당연하죠.” 대답하다가 그 말에 스스로 놀랐다. 나 자신에게 해줘야 할 말이었다.
계속해서 고급 호텔과 쇼핑몰만 보이던 시내 중심지를 벗어나니 진짜 보고 싶었던, 평범하고 소박한 스리랑카 동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슬럼에 가까운 빈촌도 보았다. 이 모습들만으로 진짜 스리랑카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이 나라의 또 한 겹을 보았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을 찾아 그 길에서 내렸다. 아저씨는 미터기 요금을 쿨하게 깎아 주면서 조심해서 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영화 보러 갔던 그 쇼핑몰에서, 언제나 낯선 곳에 여행 갈 때면 하는 버릇대로 엽서를 몇 장 샀다. 마음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윤활유 정도는 충분히 되어 주지 않을까?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여유롭게 편지를 쓰다 보면 금세 편안해질 것이다. 스리랑카의 시그니처처럼 광고에 나오는 아항가마의 어부들도, 첫인상 속 오토 릭샤 기사들도 아닌, 그 편안한 순간이 나의 스리랑카로 남아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