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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Oct 09. 2015

언젠가 그러나 반드시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얼마 전 후원아동 추가가 결정되고 한동안 또 아동 서류에 매달렸다. 아이들의 이름, 생년월일, 부모님 직업,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과목, 놀이는 물론 아이들 각 가정의 사연까지 촘촘하게 한 장에 녹여내야 했다.


  쓰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하다 보면 꼭 혼자 해결할 수 없이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는 2005년 생인데 아버지가 1999년에 돌아가셨다고 적혀 있다든지. 그러면 현지인 스태프에게 전화를 걸고, 현지인 스태프가 해당 가정에 전화해 뭔가 잘못 기록된 부분을 정정했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일이 늘어지는 바람에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번에 묻기 전까지 아이가 몇 살인지, 뭘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집도 있었으니까. 아이 본인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생각하는 데만도 한참 걸리곤 했으니까, 이 정도 오류는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다.


  그러나 이해는 이해고 실무는 다른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서류 작업을 마친 후에도 보완 작업할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다시 그 일에 매달렸다. 이미 후원으로 얼굴 빛이 피어난 아이들을 여럿 보았기에, 새로운 아이들에게도 아동후원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어린 아이의 사진을 다시 찍기 위해 그 집을 찾아갔다. 현지인 스태프들이 찍어온 사진을 보니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었다. 다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포즈가 애매했다. 후원자에게 아이의 첫인상이 될 사진이므로, 바른 자세와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 말을 누누이 했으므로 우리 현지인 간사들이 이젠 사진을 잘 찍는 편인데 얘 사진은 왜 이렇지? 의아해하며 갔다. 아이의 부모님과 서너 살쯤 된 여동생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고, 이전에 만났을 때 아직 뱃속에 있던 아기는 생후 5-6개월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전에 봤을 때 초록빛 사리 자락으로 덮인 배가 제법 나와 있던 기억이 나는데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우리 결연을 받기로 한 이 집 큰 아이, 큰아이라고 해봐야 이제 고작 유치원에 다닌다는 아이는 이번에야 처음 만나는 거였다.


  아이만 태어난 게 아니라 집도 이사를 해서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전에 찾아갔을 때는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움막집이었는데, 이사한 곳은 비록 작고 지저분하긴 해도 방 같은 방이었다.


  페인트 공인 아버지는 일을 나갔고, 어머니가 푸석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를 스포츠 머리처럼 싹 밀어 버렸고, 표정은 밝지 않았다.


  현지인 간사 언니와 무언가 한참 조용히 대화를 하는 내내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이윽고 울음이 터졌다. 무슨 설움일까. 언니는 대화가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중간에 한 번 통역을 해 주었다. 임신 5개월 째라고.


  저번에 방문해서 들은 이야기와 같았으므로, 그 갓난애는 지금 침대에 누워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나도 모르게 그 아기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 텐데. 스태프 언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연년생으로 또 아이가 들어선 거였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임신이 되었기 때문에 임신인지도 몰랐다고. 다른 문제로 검진을 받다가 의사가 확인해 보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 잘 됐네요! 축하드려요”라고 인사하기엔 너무 어두운 분위기였다.


  어찌나 섧게 우는지 보는 나까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제일 큰 아이가 유치원생, 둘째는 서너 살, 셋째는 갓난아기이고 이제 뱃속에 넷째.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부부까지 총 여섯 가족. 눈물의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부는 아직 단출한 신혼 부부였던 시절 자기들이 HIV 양성임을 알게 됐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같이 알았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고향에서부터 배척을 당하며 여기까지 흘러왔다. 엄밀히 말하면 도망치며 살아 왔다. 지금도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으면 잘 가지 않는 편이라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날 까 봐 무섭다고.


  부부에게 삶은 무거움이었다. 도망쳐야 하고, 피해야 하는 적과 같았다. 그런 삶에 원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생명은 되려 부담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부부는 손을 맞잡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전까지 내게 새 생명이라고 하면 꼭 환하고 작은 빛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집이라도 아이가 생기면 바뀌었으니까. 아기 용품이며 분 냄새 같은 것들이 집에 꽉 들어차고, 아이가 한 번 생긋 웃으면 둘러앉은 어른들 십여 명이 따라 웃는 모습. 자연스레 화기애애해지는 그 분위기를 알기에, 나는 생명이라고 하면 다 빛으로 날아오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생명이 온다고 하여 꼭  환영받는 것은 아니구나. 때로는 눈물의 이유가 되고, 불안으로 이어지기도 하는구나. 침대 위에 누워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의 천진한 미소와 엄마의 눈물이 대비되어 서글펐다. 그 뱃속에서 당혹스러워하며 상처받고 불안해하고 있을 작은 생명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현지인 언니도 늦둥이를 임신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기에, 품에서 밝게 웃고 있는 늦둥이가 집에 가져다 준 기쁨을 떠올리며 한참을 위로했다. 아이가 기쁨이 되어 줄 거라고, 너무 걱정 말고 몸 잘 챙기라고.



  그리고 다음에 다시 그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드디어 결연 아동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는 독특했다. 그리고 똑똑했다. 보통 외국인인 나를 보면 얼어 붙어 멀찍이 서 있거나, 호기심에 가까이 와서 이리저리 뜯어 보거나 하는데 이 아이는 나를 제 집에 항상 오는 사람처럼 대했다.


  이름이 뭐니, 거리를 좁혀 보고자 답을 알면서 묻는 예의 질문에 아이는 노래하듯 제 이름을 포르르 외쳤다. 그 해맑은 모습에 우리 모두 미소 지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는 꼬박꼬박 질문을 던졌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제야 사진마다 아이가 다른 데를 보고 있거나 포즈가 애매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물방울처럼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통통 튀는 아이를 사진에 담기란 너무 힘들었다. 아이를 가까스로 진정시켜 필요한 사진을 다 찍고, 남자 간사들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여자들끼리만 남자 아이 엄마는 칠흑 같이 어두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뱃속의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태어나자마자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제법 긴 연휴였고 그래서 모처럼 시골 친척 집에 갔다 온 날이었다. 마을 잔치의 들뜬 분위기에  부른 며느리도 빠질 수 없었고, 잘 포장되지도 않은 길을 덜컹거리는 릭샤로 한참 달린 탓에 더욱 지친 날이었다.


  여덟 시쯤, 잠들기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뻗듯이 잠에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머니는 눈을 떴다. 양수가 터지는 걸 느꼈고, 미칠 듯한 통증이 이어졌다고 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명이 뇌리에서만 울려 퍼졌을 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때문이었다.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은 세상에서 아이는 첫 호흡을 했겠지. 그리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남편이 서둘러 구급차를 부르러 간 사이, 힘이 빠진 채 누워 있는 엄마 곁에서 아이의 숨은 멎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처치를 해주지 않은 채였다.


  동굴처럼 어두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깊이의 절망이 묻어 있었다. 그걸 세상의 어떤 말이 포착할 수 있을까? 눈물조차 흐르지 않고 굳은 채 고개 숙인 얼굴에 더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현지인 간사 언니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클리닉에 있는 닥터 D가 그에게 여러 번 힘주어 이야기했다고. 산모도 태아도 너무 연약한 상태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 아이에겐 끝까지 엄마를 붙들 힘이 없었나 보다.


  눈물로 맞아들인 생명은 그렇게 소리도 없이 떠났다. 어느 한 순간도 환영받지 못한 짧은 삶이었다. 조금 더 함께 했더라면, 사랑받는 모습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더 편히 보내줄 수 있었을 것을.


  우리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같은 공기 안에서, 같이 작게 떨고 있는 것밖에. 자식을 잃은 아픔, 깊은 바다에도 묻힐 수 없는 그 깊이를 누가 감히 톺아 보고 말로 담을 수 있겠냐만은. 그저 한숨으로, 손 다잡는 것으로, 옆에 서 본다.


  언젠가 다시 웃을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삶은 하루하루 시계 바늘을 옮길 테고, 그 안에서 일하랴 아이 키우랴 바삐 지내는 두 사람의 마음에 한 줄기 위로가 비치는 날도 있겠지. 의미 없어 보이는 작은 홀씨, 땅에 심겨 꽃 피우리라 믿기지 않는 홀씨를 후 불어 본다.


희망이란 이름을 가진 이 꽃처럼 밝은, 그런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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