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그것부터 따져보고 시작하자고요
부모님과 하는 여행은 패키지가 국룰이다. 이거 모르는 사람 있나? 이제 없다.
패키지여행은 기본적으로 현명한 결정이다. 당연하다. 여행에 따르는 여러 가지 준비를 일일이 챙긴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고되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비행기 타고 떠나는 해외여행이 워낙 대중화되어 있으니 자연스럽지만, 설령 당신이 비행기와 공항에 익숙할 만큼 익숙해진 인간이라고 해도… 돌이켜 보자. 우리 모두 과거의 어느 날에는,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던 날이 있었다. 왜 티켓에 찍혀 나온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하물며 시외버스/시내버스/지하철/배편/기타 교통수단을 조사하고 알아보고 예약하고...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게다가 가 보면 입에서 저절로 나온다. "이래서 패키지를 이렇게 짜는 거구나..." 하는 소리가. 전문가가 엄선한 코스에는 다 엄연한 이유가 있다. 맛깔 나는 가이드의 설명이나 교통편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외에도, 패키지 코스는 여행사가 파악한 한국인의 보편적인 취향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실패 가능성이 낮은 코스로만 쫙 펼쳐져 있다.
혼자라면 뭐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항공권을 결제하고 나서 해외 숙소를 예약하고, 낯선 거리에서 모국어 아닌 언어로 음식을 주문하고… 하는 일은 혼자서라면 얼마든지 낭만의 탈을 쓸 수 있다. <비포 선라이즈>를 꿈 꾸며 배낭 하나 메고 훌쩍 떠나는, 체감하기로는 이십 년쯤 전에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럽 배낭여행’에서라면 특히. 그러나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혹시라도 기차에서 누군가 말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해야 한다. 아니 그 말도 아마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서 못 들었을 것이다. 낯선 곳에 낯선 사람과 즉흥적으로 내리는 대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목적지에서 무엇을 할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알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튼 낭만은 흐른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사전에 훨씬 더 촘촘히 준비되어 있었어야 할 것이다. 설령 <비포 선라이즈> 속 에단 호크가 영화 밖으로 튀어나와서 말을 걸었다고 해도 대화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에너지도 없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에는 집중해야 할 것이 아주 많으니까.
대한민국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한 영어인증점수를 취득한 사람으로서 어찌어찌 언어의 장벽까지는 어설프게 넘어간다 쳐도, 기차 예약 방법이나 식당 주문 방식까지 일상에서 인지하지도 못했던 ‘시스템’을 하나하나 숙지하는 건 매우 피로하다. 게다가 부모님과 왔으니까, 또 언제 이렇게 멀리까지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혼자 왔다면 적당히 타협했을 것도 최선을 다하고 싶어 가장 좋은 것으로 고민한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좋은 게 부모님 눈에도 가장 좋은 것이란 뜻은 아니지. 애쓴 다음에야 그 사실을 발견하면 매우 허망해지고 피로는 더해진다. 가족이라는 편안한 사이에서, 그 피로는 상대에게 쏟아지기가 너무 쉽다. 한 마디로 싸움 나기 딱 쉬운 상태.
결론. 모두의 심신 안정을 위해, 어른스럽게 돈으로 해결하자. 전문가가 짜 주는 일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가장 한국인이 마음 편하게 느끼는 일정을, 가장 한국인이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풀어주고, 한국인에게 필요한 걸 다 알아서 준비해 주는 여행.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참고로 나는 몇 년 전 엄마와 동생과 떠났던 베트남 여행에서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음에 펑펑 눈물을 떨군 적이 있다. 엄마는 우는 애한테는 말도 못 하고, 나중에 동생한테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절대 쟤랑 여행 안 다닌다…”라고. 어쩐지 동생이 묘사하지도 않은 부들부들... 질끈... 같은 단어가 엿보이는 듯한 대사다.
똑부러지게 준비해서, 딱 준비한 대로 일정을 멋지게 펼쳐내어, 엄마의 감탄을 보고 싶었는데. 엄마가 다른 의미로 놀랄 일이 자꾸 생겼다. 예를 들어 택시비가 160,000동이라면… 택시에서는 16인가 160인가 하는 숫자가 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160,000동이 아닌 1,600,000동을 내밀면서 이틀을 살았는데… 택시비가 왜 이렇게 비싸지 서울과 별로 다르지 않네, 이상하네… 하다가 어느 한 번은 액수가 꽤나 커서 도저히 상식적이지 않아 돈을 내면서도 멈칫했다. 그때 오히려 화들짝 놀라며 이거 아니라고 손을 절레절레 젓는 택시 기사님 덕분에 알았다. 이틀 동안 택시비를 10배로 내고 다니고 있었다는 걸.
그게 다였다면 좀 괜찮았을까? 아무튼 일정은 마음 같지 않게 굴러갔고,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너절한 실수들이 계속 쌓였다...고 나는 느꼈다. 사실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여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튼 기분 좋게 매듭짓는 것이었으나, 나는 엄마에게 가장 좋은 여정을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정작 엄마의 기분을 망치면서까지 자책하다 급기야 울음까지 터뜨렸던 것이다. 애진작에 패키지여행을 택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자유여행을 꿈꾼다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패키지여행의 템포를 따라가고 낯선 사람들과 모국어로 사회성을 발휘하는 데 드는 에너지보다 차라리 내가 계획하고 준비하는 데 쓰는 에너지 쪽이 더 편안하겠다고 판단한 쪽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좀 ISTJ 같지만 나는 ENFP다. MBTI가 뭐 절대 공식인 건 아니니까.
여기에는 작은 사유들이 뒤섞여 작용했다. 우선 이 여행은 애초에 몇 년 전부터 엄마가 “유럽은 다리가 성할 때 가야 한다던데…”라고 하던 말에서 시작했으므로 대륙은 반드시 유럽이어야 했는데, 유럽 여행은 하루 1만 보씩을 가뿐히 찍는 여행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왕 유럽까지 간다면,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싶었다. 가끔은 그냥 크루아상에 커피로 현지인처럼 아침을 깨우고 동네를 산책하기만 하는 하루도 좀 보내고 싶었다. 대부분 시간이 빠듯한 패키지 여행 상품 사이에서 느긋하고 여유로운 패키지를 찾아 서치하고 예약하는 품을 들이는 것보다는, 적당히 갈 만한 곳을 선정해 느슨한 여정을 준비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아마 이 글을 클릭한 당신 또한 높은 확률로 부모님과의 자유여행을 선택지에 올려 두었을 것 같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큰 이유가 없다면, 특히나 함께 가는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면, 패키지 하세요. 끝.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철저한 자유여행 파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님과의 여행이라고 해도 패키지보다는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사람. 아니면, 부모님이 친구 분들과도 가실 수 있는 패키지 여행 대신 자유여행의 경험을 맛보셨으면 하는, 그만큼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사람.
방식과 정도는 다를지언정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반대로 자유여행을 선택할 일은 인생에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은 하다 싶은 사람들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며 방문했던 수많은 블로그 선생님들께 헌사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써 본다.
패키지여행의 절대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유여행에도 나름의 맛이 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장단이 있다. 내 경우 자유여행을 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미지의 세계에 나아가면서 내가 '엄마'로 알던 사람이 아닌, 인간 누구누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늘 내게 엄마의 역할을 다해주었던 사람이, 내게 엄마라는 표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실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 인간의 성향을 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새로운 세계에 호기심이 많은지, 문제 해결 능력이 좋은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당황하지만 그래도 하루를 좋게 좋게 마무리하고자 하는 사람인지... 같은 것들을 발견하는.
당신이 자유여행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 또한 고민의 가치가 있다는 말과 함께, 일단 아무 준비 없이 시작됐던 얼레벌레 여행기를 보고 고민하시라는 말도 함께 남겨두고 싶다. 지금부터 외쳐보겠습니다. 야너두부모님과유럽자유여행할수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