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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09. 2024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엄숙히 선언하시오

여행을 앞두고 '선서'할 결심

“엄마랑 유럽 가신다고요? 패키지죠? 자유 여행? 괜찮겠어요?”


이 말을 정말 숱하게 들었다. 이미 뭐 우리 또래에게는 ‘널리 알려졌다’는 표현조차 머쓱할 만큼, 부모님과 하는 유럽여행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가 돌고 돈다.


비싼 파스타를 주문해 놓았더니 “이게 얼마라고? 아이고… 그 돈이면 차라리 라면을 먹겠네.” 하시거나, 조금 생소한 음식 혹은 맛이 다른 음식이 잔뜩 차려진 식탁 앞에서 “물이 제일 맛있다, 야” 하시거나… 하는 상황에서 느낄 법한 감정과 그에 대한 대책을 서술하시오.



여행 지역을 고르고, 코스를 짜고, 맛있다는 식당을 찾고, 거기를 어렵게 예약하고… 같은 과정을 무수히 해온 자식 입장에서는 참으로 맥이 빠지는 발언들이 인터넷에 숱하게 발견된다. 친구들끼리 얘기하다 보면 가정 내 평화를 위해 무조건 패키지 가라는 말이 거의 정답처럼 나온다.


그러다 보니 유럽 여행을 부모님과 함께 가는 경우, 자식들이 선서 같은 걸 준비해서 부모님이 읽으시도록 하는 영상도 인터넷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집의 경우 그런 걸 재미있어 하면서 하는 사람은 없고 그저 얼굴 빨개지며 멋쩍어 하는 사람들의 조합인지라, 그리고 지난 여행을 통해 문제는 엄마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희 엄마는 괜찮아요. 새로운 데 다니는 것도 좋아하시고 외국 음식에도 거부감 없으시고… 저만 잘하면 돼요.”


나는 잘하겠지. 아무 문제없겠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망할 놈의 자만심. 이렇게 교만을 떨던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여행을 앞두고 6주 동안 3개국으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항공권과 숙소는 애저녁에 결제해 두었고, 기차까지도 어찌저찌 예약을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여행을 눈앞에 맞이했다는 사실을… 결국 가기 직전에 부랴부랴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아 이걸 항공권 끊기 전에 했어야 했는데’ 혹은 ‘아 이건 좀 미리 생각해 둘 걸’ 따위의 후회를 잔뜩 했다. (그 결과물이 이 글이다.)



자, 자유여행을 해볼까 마음먹으면 그때부터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선 여행 시기와 목적지를 결정한다. 여기에는 부모님의 선호, 예산, 장거리 비행 가능 여부 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것부터가 쉽지 않다. 아주 많은 부모님들께서 “아무 데나 좋지~” 하시기 때문이다. 선호가 뚜렷하고 목적이 분명한 여행의 경우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자식에게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혹은 ‘아무 데’를 언급하시는 부모님이라면, 차라리 2-3개 정도 가안을 짜서 가져가는 게 좋다.


이 가안은 국가와 지역의 이름보다는, 거기서 뭘 하게 될 지 부모님이 그려 보실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이 필요하다. 요즘은 여행 브이로그가 유튜브에 널리고 깔렸으니 그 중 내가 생각하는 여행과 비슷한 것을 골라 보여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여행 시기가 나의 휴가, 동생의 시험 등에 맞물려서 거의 정해져 있었으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여행지도 꽤나 쉽게 정했다. 몇 년 전부터 엄마 입에서 “유럽은 다리가 성할 때 가야 한다던데…” 하고 나온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아줌마들 중에 유럽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이 유럽은 어딜 가도 빵이 그렇게 맛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엄마에게 꽤나 인상 깊었는지, 간혹 가다 “유럽은 빵이 그렇게 맛있다더라. 어딜 가도 다 맛있대.” 같은 말도 종종 붙었다. 사실 문장 자체만 보면 별 정보 값이 없는 말이다. 아시아 어디에 가도 쌀밥 다 맛있다더라 하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말들 안에서 최대한의 정보를 도출할 수 있다.


우선 엄마는 유럽 여행을 갈 경우 많이 걷는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꽤나 체력이 좋으신 편이기도 하니, 이동이 좀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동네 아줌마들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고려하면, 첫 유럽 여행으로는 그래도 다녀왔다고 말했을 때 좀 사람들 귀에 익은 곳이 좋을 것 같다. 유럽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유럽 국가이자 랜드마크가 뚜렷한 곳들. 그러자 우리의 후보군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 중에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줄어들었다.


빵은 둘 다 맛있겠지 뭐. 물론 제과 제빵으로는 프랑스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유럽은 빵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하는 정보를 말한 거지, 엄마가 빵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럽 대도시 치안은 어딜 가나 비슷비슷하다지만, 프랑스 파리는 치안 문제에 덧붙여 강아지 만한 쥐가 돌아다닌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꽤나 많이 들려와, 이탈리아 쪽으로 마음이 좀더 기울었다.


여기에는 나의 얄팍하고 조금 치사한 계산도 작용했다. 언젠가 꼭 학벌을 세탁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지만 아직 세탁하지 못한 나의 꼬리표에는 ‘프랑스어과 졸업’이라고 써 있다. 정작 프랑스어 쓰는 나라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로, 대학교 때는 이런저런 활동에 바빠 프랑스어는 거의 못한다. 4년치 등록금을 내준 엄마 입장에서, 거기까지 가서 버벅거리고 있는 걸 보면 얼마나 속이 터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회피형 사고방식이다.


마침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주변인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이탈리아는 영어 다 통해.”, “이탈리아는 어디 들어가도 다 맛있어.”라고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이탈리아로 가보자고. 그랬더니 동생이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단다. 포지타노란다. 찾아보니 4월은 북부가 아직 추워 피렌체는 조금 더 있다 가는 게 좋단다. 그러면 로마로 가서, 포지타노로 이동하고… 음. 일단 여기까지 정한 것만 해도 큰 일 한 셈이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이런 식으로 나의 첫 자유여행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문제를 풀 때까지 마시멜로를 꾹 참아야 하는 아이처럼, 한 단계 넘어갈 때마다 마시멜로를 꿀꺽 삼키듯이 “오늘은 여기까지!”를 외치는 내가 있었다. 정보를 일일이 찾으면서 최선의 루트를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다시 말해 자유여행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눈 딱 감고 낙하… 숨 참고 러브 다이브… 같은 느낌…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인터넷 선생님들의 선서는 참으로 옳은 방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인터넷 세상의 선생님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물이 제일 맛있다’ 하지 않기, ‘아직 멀었냐’ 금지, ‘돈 아깝다’ 금지 등 부모님께서 자주 하시는 발언을 애당초 차단하는 귀여운 방법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선서’라는 엄숙한 형태를 거친다는 것에도 방점이 있었다.



선서는 언제 어떻게 하는가? 공적인 기관에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의지를 가지고, 남들 앞에서 공표하는 방식으로 한다. 즉, 뱉은 말이 있으니 지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다. 우리 엄마는 선서 준비할 필요 없지~ 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내가 선서를 했어야 했다. 나중에 자유여행을 또 가게 된다면 나는 꼭 아래와 같이 선서하고 시작할 것이다.


<선서>
자유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는 아래와 같이 선서합니다.

하나.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향으로 여행이 펼쳐지지 않더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둘.     여행 준비하는 과정에서 들이는 노력을 생색 내지 않겠습니다.
셋.     “나도 여기 처음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 않겠습니다. 크고 작은 질문 앞에 마음을 열겠습니다.
넷.     무엇보다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매 순간 잊지 않겠습니다.


선서도 하고, 목적지까지 정했다면, 이제 정말 여행 준비를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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