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Jun 30. 2024

지역 간 이동이 있다면

웬만하면 택시 탑시다

항공권과 숙소 예약을 마치고, 마치 준비를 끝낸 듯한 만족감이 몰려온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부담감 하나가 꾸물꾸물 몰려오기 시작했다. 야심차게 잡아 놓은 일정에 따라 지역에서 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코레일 어플 하나면 만사 오케이인 한국에서와 달리, 가본 적 없는 외국의 교통 시스템부터 이해해야 했다.


이럴 때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미풍양속에 따라 초록창에 검색어를 두드려 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의 계승자, 블로그 선생님들의 기록에서 웬만한 정보를 다 찾을 수 있다. 유럽여행 카페도 가입하기는 했으나, 가입 일수와 글/댓글 수를 어느 정도 채워야만 정보글 열람이 가능하다. 그래야 양질의 글이 계속 올라와 카페가 활성화될 수 있으니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만... 이 바쁜 세상, 여행 준비할 시간도 겨우 짬을 내고 있는 마당에 매일매일 카페 출석체크를 할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러니 모든 걸 알고 계시면서 모든 걸 가감없이 알려 주시는 블로그 선생님들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블로그 선생님들께 배운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 철도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였다. 트렌이탈리아(Trenitalia)와 이탈로(Italo). 트렌이탈리아는 국영이고 이탈로는 민영이다. 대체로 트렌이탈리아가 좀더 저렴한 편이며, 시설도 이탈로가 더 좋다고는 하지만, 신혼여행 가신 블로그 선생님들의 친절한 사진자료를 보니 트렌이탈리아라고 뭐 못 탈 정도로 시설이 나쁜 열차는 아니었다. 트렌이탈리아를 KTX에, 이탈로를 SRT에 비유한 블로그 선생님들이 많으셨는데, 나는 시설도 저 정도면 괜찮고 트렌이탈리아 가입도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고 나는 SRT보다 KTX를 더 좋아하니까... 하면서 트렌이탈리아를 예매하기로 했다.


내가 예매해야 할 기차는 총 세 편이었다. 아말피에 가기 위해 로마-살레르노, 남부 일정을 마치고 스펠로로 이동하기 위해 살레르노-스펠로, 귀국 직전 로마로 돌아오는 스펠로-로마. 친절한 블로그 선생님의 캡처가 인도하는 대로 한 단계씩 해본다. 가입하고, 가장 먼저 로마-살레르노행 결제를 완료했다. 된 거야? 내가 이탈리아의 기차 표를 산 거야? 이렇게 쉽다고?


트렌이탈리아 고속철도

으음~ 쉬울 리가. 다음부터 바로 난항이었다. 우선 살레르노-스펠로는 직행 열차가 없어, 살레르노-로마, 로마-스펠로 두 개의 열차를 묶어 결제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살레르노-로마는 대도시 간의 운행이라 고속열차가 있고, 로마-스펠로는 레지오날레regionale라고 부르는 지방 열차가 있어 갈아탈 수밖에 없던 거였다.) 거기까지는 오케이. 환승하면 된다는 거잖아. 그럼 쿨-결제!


결제가... 되지 않는다. 왜지? 똑같은 카드, 똑같은 방법으로 방금 됐잖아! 심지어 오류 메시지조차 “에러가 났습니다” 한 문장이 달랑 전부였다. 그건... 나도 알아... 보기만 해도 안다고. 너는 이유를 말해 줘야지...


침착하게 우선 로마-스펠로 행부터 결제해 보려 했으나, 역시나 되지 않았다. 뭐야. 뜬 오류 메시지를 포함하여 초록창 검색을 또 동앗줄처럼 붙든다. 같은 현상을 마주하신 분의 진땀이 느껴지는 카페 질문 글과, 유럽여행 고수로 추정되는 회원님이 달아두신 댓글이 보인다. 그러면 한 2주쯤 있다가 다시 해보시면 될 거라고. 오... 한국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해법이지만 뭐 그렇군.. 실제로 몇 주 후에 해보니까 됐다. 그새 가격이 좀 오르긴 했지만... 역시 코레일이 최고다 생각하며 기차 예약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어쩐지 mbti 끝자리가 J가 된 듯한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는 어플 노션에 페이지를 하나 만들었다.


대충 이렇게 생겼다. 거의 메모장처럼 쓰는 수준이지만.


이미 처리한 것과 앞으로 처리할 것들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다. 일정 표를 만들고, 낯선 지명과 익숙하지 않은 교통 수단 사이 혹시라도 놓쳐서 현장에서 “헉!” 하지 않으려면 슬슬 준비해야 할 것들도 줄줄 나열해 두었다. 기차는 3개 구간이 맞지? 뭐 빼먹은 거 아니지? 아말피-포지타노는 보통 시타(sita) 버스 혹은 페리로 다닌다는데, 둘 다 별도 예약하는 시스템은 아니고 바람이나 날씨에 따라 페리가 취소되기도 한다니 그냥 가서 하기로 하고. 스펠로에서는 역에서 숙소까지 택시 타면 되겠지. 살레르노 기차역에 도착해서 아말피까지는 어쩌면 좋을까...


...라고 고민하기도 전에, 예약한 아말피 숙소에서 부킹닷컴을 통해 딩동 메시지 하나가 왔다. 혹시 택시 픽업 필요하냐고. 그쪽에도 가격을 물어보고, 살레르노에서 택시를 잡아 타신 블로그 선생님의 가격 정보와 비교하고, 버스를 탔다가 짐 들고 만원 버스 뛰어올라 타느라 고생하셨다는 또 다른 블로그 선생님의 후기까지 확인한 다음, 숙소 측에 택시 픽업을 부탁했다. 이것이 신의 한 수였다.


나의 지역 간 이동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변수가 발생한다. 변수가 있어봤자 예약되지 않은 구간에서나 일어나겠지. 날씨가 허락된다면 푸른 바다를 가르는 페리를 타고 싶지만, 아니라면 버스를 타면 타는 거지. 그 정도로만 안일하게 생각했다.



우선 변수1. 붐비는 기차역은 그 자체로 변수이며, 그래서 우리는 긴장한다.

나는 긴장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레벨을 간과했다. 엄마도 나도 일상에서 이미 긴장도가 꽤나 높은 편이다. 좋게 말해 정신줄 꽉 잡고 사는 편이지만, 부작용으로 사람이 그다지 여유롭지 못하고 승모근이 자꾸 올라온다. 아주 칠렐레팔렐레 사는 건 아니어도 어느 정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는 동생이 평소 완충 지대 역할을 하는 편인데, 낯설고 치안 안 좋기로 소문이 날 만큼 난 곳을 가면서는 셋 다 빳빳하게 긴장을 해야만 했으니...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스스로도 긴장하고, 다른 사람이 긴장을 풀까봐 닦달하고... 전쟁통 참호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캐리어를 끄는 동양인에게 이따금 꽂히는 눈총에 조심해 가며, 플랫폼 번호까지 물어물어 찾고, QR 코드 들어가는 것도 일이었는데... 자 이제 몇 호 차 타는 사람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한국은 친절하게도, 같은 역에서도 참 꼼꼼히 마크를 해두었다. 여기가 전철로는 5-3칸이고 ITX 열차로는 3-2칸임을. KTX 15호차와 16호차는 여기쯤에 서서 타면 된다는 것을. 그러나 여긴 도저히 모르겠다. 일단 적당히 사람이 없는 쪽에 서 있다가 적당히 올랐다. 기차를 무사히 탔다!


기차를 탈 때 짐을 분실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다고 해서 안 끊어지는 어쩌고 자전거 체인을 사들고 왔는데, 다행히 첫 기차에서는 우리 윗칸에 짐을 올릴 수 있었다. (주변의 친절한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도와주셨다.) 하지만 이후로도 우리의 긴장도가 낮아지지는 않았다. 레지오날레 열차를 탈 때에는 별도 칸에 올려두고 눈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느라 또 피로했다. 다행히 소매치기를 만나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하긴 했다.


44분 연착 됐다네요...

또 하나의 변수는 연착이다. 다행히 내가 겪은 연착은 40여 분 정도로 무난했고, 로마에서 살레르노로 이동하는 것 외에 추가 일정이 없는 날이어서 시간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환승이 있을 때 연착이었다면... 상상하기 싫다.


환승하려면 꽤나 많이 걸어야 한다. 로마-스펠로는 고속열차가 없고, 레지오날레(regionale)라는 지방열차를 타야 하는데... 1A 플랫폼은, 혹시 너 9와 4분의 3 승강장 뭐 그런 거니? 1번부터 십 몇 번까지 숫자로 이루어진 플랫폼보다 좀 뒤쪽에 있다고 듣긴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도 한참 가야 해서 조마조마했다.



나는 이 모든 과정 내내 꽤나 긴장했고 날카로웠고 예민했기에, 그 내내 후회했다. 유튜브로 좀더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아서라도 내가 마음의 준비를 좀더 했다면. 그래서 엄마 긴장하지 않으시도록 편안하게, 긴장감 없이 이끌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기차역도 지방으로 가면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역시 소도시 취향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변수2. 페리가 취소되어 버스를 타야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이 지역 여행자 모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말피, 포지타노를 포함한 일대 마을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해변도로로만 연결되어 있는데, 이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확장도 골사도 불가하다. 자그만 자동차들 사이로 숙련된 시타버스 운전자들이 용케도 다니는 길이다.


이 일대의 도로는 좁디좁다.


우리 숙소는 아말피 메인 지역과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포지타노에 가려고 나와서 버스를 한참 기다리는데, 버스가 우리를 태워주지 않는 것이다. 기사님은 단호하게 손을 들어 거절 의사를 표한 다음, 다음 차를 이용하라는 듯 뒤쪽을 가리켰다. 얼추 버스가 차 보이기는 했지만, 9호선의 나라에서 온 제 눈에는 기둥 뒤에 공간이 보이는 거 같은데... 뭐 아무튼 이제 어쩌지? 갈팡질팡 고민하다 일단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 아말피 메인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포지타노에서는 멀어지는 방향이었지만 여기 있으면 줄줄이 승차 거부를 당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숙소 앞의 정류장. 여기서는 한 번도 버스를 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맞았다. 이런저런 루트로 아말피 메인에 도착한 한 무더기의 양인들이 포지타노행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페리가 취소되면 버스를 타면 되지, 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페리가 취소되면 페리를 타려던 모든 사람들이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을. 와중에 시타버스 직원들에게도 이 상황이 익숙지 않은지 사람들을 어떻게 줄 세울지 명확한 기준이 없어 일단 세우고, 그 사람들을 또 뒤로 보내고... 그러느라 인도계 미국인 남자 하나가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들을 먼저 태우냐고. 만원버스의 나라에서 온 나조차 피로를 느끼고 있었으니 거대한 땅에서 온 그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웠으리라.


 땡볕 아래서도 어찌저찌 시간은 가고,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버스는 이따금 반대쪽 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멈춰섰고, 아슬아슬한 후진과 전진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그곳은... 거친 운전과... 불안한 (양인들의)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서울의 출퇴근길에 절여진)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변수3. 아 이걸 왜 이제 알았지?

포지타노에 가서야 알았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이 왜 로마에서 당일치기로 오가는 포지타노 상품을 만드는지. 여기까지 오가기가 쉽지 않다. 숙련된 운전자가 렌트를 해서 와도 에너지가 만만치 않게 들고, 대중교통과 택시를 뒤섞어 우리처럼 와도 쉽지 않다.


그리고 당일치기로 오가는 데서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이 꽤나 많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포지타노보다 아말피를 비롯한 인근 마을들이 더 좋았는데, 포지타노의 첫인상은... 뭐랄까 한국에 프로방스마을 혹은 독일마을 같은 곳들처럼 “조성된” 느낌이 더 강했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반질반질해진 느낌. 그곳의 진정한 매력을 보려면 골목을 오래 걸어 보아야 할 텐데... 그러기엔 또 모든 게 너무 비싸다. 반 나절만으로도 꽤나 충분하다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만원 버스에 실려 있던 미국인 관광객들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 또한 비슷한 인상을 받은 듯싶었다. (엿들은 건 아니고, 그들이 우리를 투명인간처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어 잘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여정에서 만난 다른 국적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미국 사람들만이 유독 그랬던 건 우연일까? 유독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자기들끼리만 스몰토크를 하다가 "그 손에 들고 있는 티켓 어디서 샀어요?" 같은 거 물어볼 때만 말을 걸었다. 기분이 오묘했다.)



그리고 아말피-포지타노 일정을 모두 마친 후 살레르노로 돌아왔을 때 알았다. 비교적 숙소 가격이 저렴한 살레르노에 짐을 두고, 페리나 버스를 이쪽에서 타고 당일치기로 포지타노나 아말피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아 좀 미리 알았으면 루트를 좀 다르게 짰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아말피 숙소가 워낙 맛집으로 유명해서 하나하나 다 만족스러웠고, 여기서 버스를 탔어도 마찬가지 고생을 했을 수도 있지만... 다양한 루트를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겠다 싶긴 한 것이다. 역시 철저한 리서치가 필요하다.



철저한 리서치와 함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세”다. 사실 나는 테르미니역을 처음 보고 조금 놀랐는데, 치안이 안 좋고 노숙자가 많아 위험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는 무난해 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 가장 혼란스럽고 정신 없는 기차역은 인구 13억 국가의 수도, 뉴델리 메인 역이었다. 거기서 사기 당하면서 인생 공부 좀 했잖아... 인도에서 기차도 타고 다니고, 만원버스와 지하철에 낑겨 다니는 건 서울의 일상인데. 나는 왜 그렇게 쫄아들어 잔뜩 긴장을 했던 걸까! 짐을 야무지게 챙기고 조심하면서도 조금 더 기세 좋게, 여유를 갖출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른 지금. 실제로 좋은 여행이기도 했고, 힘들었던 기억은 적당히 다 미화되어 “아, 그 여행 참 좋았다!” 밖에 안 남았는데, 지역 간 이동이 조금 더 매끄럽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마음에 콕 박혀 있다.


지역 간 이동 자체는 추천하고 싶다. 다양한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간중간 여행 자체를 리프레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다만 우리의 미풍양속을 잘 기억하시어, 초록창 블로그 선생님들의 정보를 꼭 촘촘히 찾아보시는 것으로. 그리고 웬만하면.. 택시 탑시다.


[오늘의 요약]
- 지역 간 이동이 있다면, 블로그 검색을 통해 이미 가본 사람들의 여행기를 많이 읽고, 미리 관련 교통수단/가격/변수/위치를 파악한다.
- (이 과정에서 뜻밖의 맛집이 발견될 경우 지도에 찍어 둔다.)
- 철저한 리서치와 함께 기세를 갖추자.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한민국 대중교통 환경을 뚫고 다니는 우리, 못할 거 없다.
- 웬만하면 택시 타자. 돈보다 부모님 마음이 우선이다.


이전 04화 숙소를 예약해 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