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의외로 가장 막막했던 건 “거기 가서 뭐 하지?”였다. 도착 직후와 출발 직전, 로마에서의 짤막한 일정이 가장 고민되었다. 로마처럼 볼 게 많은 곳에서 뭘 할지 고민하다니? 이상해 보이겠지만… 선택지가 너무 많아도 고민은 찾아오는 것이다.
로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서양사의 중심지. “로마 관광지” 검색만 해도 며칠 분의 일정이 주르륵 뜬다. 대도시에서 긴장한 채 다니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로마 일정을 최소한으로 잡아 놓았다. 우리에게 있는 시간은 약 2일. 밤새워 비행기를 타고 점심 나절 로마에 도착해, 호텔 체크인 후 반나절 약간 안되는 시간과 다음 날 하루까지 약 1.5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오후 2시쯤 로마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 일찍 공항으로 떠날 때까지 약 0.5일. 도합 2일이 살짝 안되는 시간이고, 밤샘 비행 직후 혹은 여행 끝물이어서 컨디션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볼 것이 많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탐구해야 할 내용도 많다는 걸 뜻했다. 사람들이 보통 가는 관광지가 어디어디 있는지, 물론 콜로세움처럼 바로 생각나는 것도 있지만 덜 알려진 곳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찾아보고 그 중에 가고 싶은 곳만 선택과 집중하는 것이 필요했다. 근데 그걸 어느 천 년에 다 보고 앉아 있어요… 고등학교 때 세계사를 공부했거나 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우리 자매 각각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로마 건국한 형제가 늑대 젖을 빨고 있는 동상 그림 하나뿐이고… 동생은 동남아시아사를 공부했다…
우리의 로마 일정에서 뚜렷한 건 딱 하나뿐이었다. 바티칸 시국에 가자는 것. 로마에 있지만 이탈리아가 아닌 도시국가, 카톨릭의 총본산. 바티칸 미술관과 시스티나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곳.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내로라하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그 하나는 정했지만 나머지 얄팍한 시간에 대체 어디에 가는 게 가장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박물관을 한두 군데 둘러볼까? 그냥 시내를 돌아다녀?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 그밖에 내가 잘 모르는 어딘가?
이럴 경우 일반인이 선택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유튜브 로마여행 브이로그를 싹 뒤진다.
두 번째, 서점에 가서 ‘로마’ 혹은 ‘이탈리아’ 여행 책을 뒤진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서 철저하게 두 번째인 인간이다. 우선 브이로그에는 ‘개인의 예쁨’을 담은 순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양에 비해 영상을 보아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애초에 나는 온 세상이 유튜브를 검색 엔진으로 쓴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구글과 네이버를 양손에 쥐고 있는 텍스트형 인간이다. 텍스트로 읽으면 3분에 끝날 걸 왜 20분짜리 영상으로 보고 있어야 하는지… 사이사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을 외치는 목소리와 남의 커플 의사결정 방식까지 듣고 있을 시간 따위 없다.
책이 좋은 점은 하나 더 있다. 아무래도 브이로그는 개인의 여행 경험을 쌓고 공유하는 목적이 강하다 보니, 정보성이 없지는 않으나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4월 21일은 로마 건국 기념일로, 이 날은 매년 로마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국립 박물관의 입장료가 무료인데, 이런 정보는 딱 그 시기에 로마를 방문한 사람의 브이로그가 아니라면 포함되어 있기 어렵지만 웬만한 여행 책에는 다 기입되어 있는 정보다. 딱 4월 21일에 로마에 도착하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쏠쏠한 정보였다. 아쉽게도 그 날이 일요일이었고, 밤샘 비행 직후라서 그냥 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건 기분이 다르니까.
텍스트형 인간인 나와 달리 동생은 유튜브로 정보를 파악하는 데 꽤나 익숙한 편이다. 나란히 카페에 앉은 어느 오후, 그럼 너는 브이로그를 담당하라고 유튜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동생에게 맡겨 놓고 노션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데, 잠시 후에 보니 밀라논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워낙 이탈리아에 오래 사신 할머니이시니, 여행지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도 있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알고리즘 타다 말고 대뜸 이탈리아어 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하… 다섯 마디쯤 배우면서 다 쓸 데가 있다고 당당하게 굴더니 결국 다 까먹어서 한 마디도 못 써먹었다.
동생은 당시 공무원 시험을 코앞에 둔 수험생이었고 나는 출장과 야근이 몰린 시기의 직장인이었다. 유튜브고 책이고,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결국 동생은 다른 카드를 검색해 왔다. 밀라논나 영상이나 보고 있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는데… 이번에 가져온 카드는 우리 여행에 꼭 필요했던 카드였다. 유명한 일일투어 업체를 찾아온 것이다.
바티칸 시국 방문은 애초에 일일투어로 할 생각이었다. 바티칸 시국에 얽힌 역사와 거기 있는 작품들의 양을 생각할 때, 그 의미를 나나 동생이 파악해서 방문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반드시 한국인 가이드가 이끄는 투어를 찾을 생각이었다. 몇 년 전 베트남 여행에서 현지 분이 영어로 설명하시는 하롱베이 투어를 멋모르고 신청했는데, 좁은 동굴 길을 걸으면서 엄마와 딱 붙어 일일이 통역을 하는 건 동선 상 쉽지 않았다.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바티칸에서 또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동생이 찾아온 바티칸 투어는 시작 시간이 무려 아침 6시였다. 아니 우리는 왜 유럽 한복판까지 가서도 이렇게 한국인스럽게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하는 것인가? 동생에게 그게 정말 최선인지 다시 물었지만, 동생은 그 업체가 우리 또래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는 것,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로 투어를 이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 결정적으로 바티칸 시국 오픈 시간을 고려한 시간 선정이므로 딱히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들어 조목조목 반복했다. 밀라논나 영상 보고 있을 땐 ‘망했다, 이 여행 준비는 독박이구나…’ 싶었는데 제법 그럴 듯했다.
바티칸 투어는 아침 일찍 시작하는 대신 점심 즈음에 일찍 끝났다. 밤샘 비행 후 로마에 도착해 피곤할 테니 첫 날 일찍 자면, 아침 일찍 시작하는 일정도 그럭저럭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점심에 들어와서 잠시 쉬면 되잖아. 마침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 업체에서는 ‘로마 야경 투어’라는 이름으로 저녁 나절에 시작하는 반나절짜리 투어를 하나 더 운영하고 있었다.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산탄젤로 성(천사의 성)을 비롯한 로마 시내 주요 명소들을 산책하듯 다니는 일정이었다. 하나하나 입장하여 들여다보는 투어는 아니어서, 개별 장소를 제대로 체험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쉽겠지만, 우리처럼 수박 겉핥기 느낌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장소를 훑어보기만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딱 좋은 투어였다.
두 개를 하루 안에 소화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만족도가 매우 높은 알찬 하루였다. 알고 보니 바티칸 시국은 가이드와 함께 갈 때와 아닐 때 선택할 수 있는 통로가 달랐고, 내부에 우리 말고도 가이드 일행이 바글바글해서, 어느 작품 앞에 잠시 멈추고 또 가고 하는 움직임을 통제하는 데 굉장히 노련한 기술이 필요했다. 로마 역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현장에 대한 이해까지 높은 훌륭한 가이드 분의 설명과 인솔 덕분에, 굉장히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디서 사진 찍으면 잘 나오는지를 명확하게 안다는 것 또한 현지 거주 가이드의 강점이었다.
우리는 말 잘 듣는 모범생들처럼 가이드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이 허공으로 혼자 흩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리액션을 했다. 사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비롯해 그 날 거기서 보고 들은 이야기의 상당수가 기억나지 않음에도, 아무튼 알찼다는 감각만큼은 명확하게 남아 있다.
정작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건 다른 지점이다. 우리를 맡은 가이드는 (어쩌면 직업병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내는 사람이었다. 야경 투어를 막 시작하고 제국로를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황금빛으로 저무는 노을이 건물 벽면에 반사되어 아름답기만 했던 날씨가, 이내 비를 툭툭 떨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잠시 버스와 지하철을 타기는 해도 대체로 걷는 일정이므로 사실 다소 당혹스러웠으나, 가이드는 밝은 미소를 빛내면서 말했다. 자기가 날씨 요정이라 버스 내릴 때쯤 비가 그칠 거라고. 걱정 말라고. 그리고 비가 살짝 오면, 돌바닥이 반짝반짝 빛나서 아주 로맨틱하고 예쁘다고.
그의 노력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으로 같이 웃었지만 사실 믿지는 않았다. 비 오면 귀찮기나 하지 뭐. 단지 저렇게나 애써 주시는데, 그냥 군말없이, 표정 굳히는 일 없이 비를 맞도록 하자.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돌바닥은 물에 젖어 저녁 로마 골목골목의 불빛을 반사하며 예쁘게 빛났다. 살면서 특히 일하면서 겪게 되는 일 앞에서 이런 마음과 자세를 갖는다면 나도 좀 더 예쁜 풍경들을 볼 수 있게 될까. 당시 일에 지쳐 있던 나는 그 가이드의 태도에 거의 경이를 느꼈다.
사람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태도를 중요시하는, 본인이 그렇게 사시기에 그런 사람을 볼 때 좋아하는 우리 엄마에게도, 그 가이드는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 그 가이드의 대단한 업무 능력과 멋진 태도를 떠올린다. 우리 셋만 바라보는 여행에서 이따금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사람, 단순히 바티칸 시국과 로마 시내뿐 아니라 여행의 자세를 인솔해주는 멋진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일일 투어는 정말 해볼 만하다.
아, 물론 여행 준비를 덜어주는 전문가의 솜씨라는 근본적 이유도 잊지 말자. 다음에 로마 같은 대도시를 들리게 된다면, 한국인 구매 일일투어 베스트 10위 혹은 20위권까지 쭉 훑어본 후에 여행 일정을 짤 것이다.
[오늘의 요약]
- 자유여행이어도 중간중간 일일 투어를 넣어주면 활력이 돈다!
- 바쁜 현대인이 일일이 알아볼 수 없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 코스 선정부터 설명까지 전문가의 솜씨에 맡기자.
- 열정과 애정으로 일하는 가이드의 모습에서도 많은 걸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