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훌륭한 갈등 예방 방법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여행 직전에 해외 출장이 3건이나 있었고, 3건 중 혼자 간 출장은 하나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짐을 싸는지를 조금씩 볼 기회가 있었다. 특히 식당조차 마땅치 않은 외딴 지역 출장이 잦은 사람들은 레토르트 식품을 활용하여 나름의 한식 조달 노하우가 다 있었다.
혼자 출장 다닐 때는 한식을 잘 갖고 다니지 않는다. 나는 보통 길어야 일 주일 정도 가는 출장이 많고, 주로 아시아 지역 출장이고, 아시아 음식은 웬만하면 다 잘 먹으니까. 특히 방글라데시 출장 때에는 인도 음식과 얼추 엇비슷한 종류의 음식이 많다 보니, 반가움마저 느끼면서 먹는다. 출장 기간의 곤혹스러운 식사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단체 출장에서 컵라면을 구메구메 펼쳐 놓고 같이 먹고는 알아버린 것이다. 한식의 맛이 있구나! (당연한 소리긴 하다.) 하루 종일 땀에 절어서 오프로드를 달리며 여기저기 오간 지 3일째 되는 저녁이었고, 유난히 외진 지역이라 갈 만한 식당도 두어 군데밖에 없었다. 이렇게 잔뜩 지쳤을 때는 음식이 몸에 들어오는 느낌이 다르다. 식당에서 서비스라며 내어 주신 사탕수수 착즙 주스가 정말 얼마나 맛있었는지. 달콤한 주스를 한 컵 가득 마신 직후에 먹은 신라면 소 컵 하나는… 위장이 아니라 영혼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인상 깊었다.
나는 그 배움을 이 여행에 적용하고 싶었다. 우선 짐을 합리적으로 싸기 위해, 그리고 현지에서 끌고 다닐 때를 생각해서, 엄마 캐리어에는 엄마 개인 짐만 넣어 오시라고 했다. 음식 같은 건 다 여기서 우리가 챙기겠다고. 나의 출장 경험을 믿으라며 호언장담을 해둔 다음, 컵라면을 우선 한 박스 사고(신라면 소컵 6개 들이로 샀음은 물론이다), 햇반도 사고, 이것저것 사고, 다 챙기고, 집에 있던 돼지고기 장조림 통조림까지 하나 챙기려는데… 동생이 어이없어 하기 시작했다. “먹으러 가냐?” 아니 먹으러 가지 그럼.
“조금만 챙겨! 나는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을 거라고!” 그 말에 조금 흔들렸다. 하긴 가면 맛있는 거 많을 텐데 내가 너무 스크루지처럼 굴었나? 실제로 햇반 같은 게 자리를 은근히 많이 차지하는 것도 흔들리는 마음을 더 흔들었다. 햇반은 1인당 하나씩만 챙겨. 컵라면도 하나씩만. “그건 너무 적은 거 아니야?” 항변해 보았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결정을 우리는 후회하게 된다. 두고 가자고, 가서 사 먹을 거라고 빠득빠득 우기던 동생은 지가 제일 먼저 컵라면을 찾았다. 엄마는 “너네가 다 알아서 챙긴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챙겼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가 뭐라도 챙겨 왔을 텐데…” 하셨고, 나는 그러게 내가 챙길 때 두지 왜 그런 소리는 했냐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동생을 구박했다. 하나 마나 하는 소리 했다고 욕이나 먹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해외여행을, 특히 한식당이 많지 않은 지역으로 가는 여행을 염두에 두신 분이 계시다면, 반드시 아래 내용 참고하시어 이러한 갈등 피하시길 바랍니다…
1. 한식당의 위치를 파악한다
- 기본 중의 기본이자, 최고의 옵션이다. 여행 목적지의 한식당 정보는 다 찾아봐 두고 구글 맵에 별표도 찍어 둔다. 미리 블로그 선생님들이 정성스럽게 남겨 주신 후기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휴무일이나 브레이크 타임 등 영업 시간도 미리 확인해 두자.
- 우리는 로마 테르미니 역 근처의 ‘가인’이라는 한식당을 찾았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이제 여행의 소회를 마무리하고 내일 아침 공항으로 떠날 일만 남았을 때였다. 열흘 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식이라 다들 찌개를 찾았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세 개 시켜 펼쳐놓고 완밥했다. 미슐랭 맛집이라더니 정말이었다. 특히 된장찌개가 맛있었다.
2. 햇반과 고추장만 있으면 비빔밥을 만들 수 있어
- 밥을 꼭 드셔야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방법을 추천한다. 옛날 드라마 주인공이 양푼에 비벼 먹는 비빔밥 느낌의 식사를 할 수 있다. 우선 햇반과 튜브형 볶음 고추장을 챙긴다. 현지 마트에서 샐러드용 야채 팩을 하나 산다. 다양한 양상추 종류와 채 썬 당근 정도가 들어있는 정도의 무난한 샐러드용 야채 한 팩이면 비빔밥을 두세 번은 해 먹을 수 있다. (한 번만 먹더라도, 남은 야채는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 정도만 휘휘 둘러서 샐러드로 만든 다음 빵과 계란에 곁들여 아침 식사로 한 번 먹을 수 있었다.) 햇반 돌리고 고추장 넣어서 휙휙 비벼 먹으면 딱!
- 혹시 근 시일 내에 두찜 같은 음식을 시켜먹었다면 일회용 기름 같은 것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런 걸 챙겨 가도 좋다. 우리는 이탈리아답게, 독채 숙소마다 올리브유가 비치되어 있어 그걸로 마무리했다. 참기름만 못하지만 아쉬운 대로 훌륭하다.
- 이건 그냥 먹어도 맛있고, 김 싸 먹어도 맛있다. 김은 자리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챙겨 갈 만하다. 우리는 샐러드용 야채 살 때 아예 마트에서 고기도 좀 사다가 집에 와서 구웠다. 호텔이 아닌 독채 숙소여서 가능했던 선택지인데, 바로 이 이유로 중간중간 독채 숙소를 추천하는 것이다.
- 참고로 이전 글에서 추천한 접이식 휴대용 포트는 햇반 한 개를 돌릴 수 있는 크기다. 다만 전자레인지에 비해 정말정말 오래 걸리고 한 번에 하나밖에 할 수 없으므로 웬만하면 독채 숙소에서 전자레인지 돌리자.
3. 현지 마트는 꼭 가보자
- 마트는 세계 어디를 가도 어느 정도 비슷한 모양새이면서도 그 나라의 독특한 점들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긴장도가 크게 높아지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의 느낌을 엿볼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마트를 꼭 가보자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 마트 한구석에 포장 초밥이나 포장 샐러드처럼 간단한 식사 메뉴가 있을 수도 있다. 동남아 마트에서처럼 ‘여기가 한국인가’ 싶을 만큼 익숙한 걸 많이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밥이 그립거나 매끼 유럽 음식이 질린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옵션이다. 포장 초밥 사다가 맛있게 먹었고, 살레르노에서는 마트 다녀오는 길에 포케 집을 발견해서 포케 한 사발 신나게 먹었다. 기본 소스 외에 추가로 챙겨 준 일회용 간장 소스가 있어, 두었다가 나중에 스펠로에서 비빔밥에 넣어 먹기도 했다.
4. 김치와 컵라면은 못 참지
- 김치는 비닐 팩으로 든 것 말고 통조림형으로 나온 걸 산다. 요즘은 꽤 많이 나와 있다. 우리는 양반 썰은김치/볶음김치 6캔 세트를 마켓컬리에서 미리 주문해 챙겨 갔다. 컵라면도 일주일에 한 개씩은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챙기는 게 좋다. 취향껏 챙기는 게 좋지만, 이상하게 해외에 나가면 신라면을 먹게 되는 건 왜일까?
- 하나씩 챙긴 컵라면이 아쉬웠을 때, 살레르노에서 뜻밖의 발견을 하게 된다. 산책하다가 반지하 창으로 펜이 한 무더기 보이길래, 문구점인 줄 알고 쓱 들어간 그곳은… 뭔가 아시아 제품스러운 문구와 잡화류를 파는 가게였던 것이다. 화장 소품이나 문구 대부분은 중국산 같아 마땅히 살 만한 게 없었지만, 한쪽 벽면 가득 컵라면과 심지어 컵떡볶이까지 있었다! 유튜브에서 한동안 먹방으로 유행했던 아이템이라고 동생이 알아보았다. 가격도 신라면 소컵은 개당 1.5유로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아, 우리는 여기서 컵라면을 추가 조달했다. 아니었으면 중간에 한번 싸웠을지도 모른다.
5. 만능 누룽지의 변신
- 누룽지는 예부터 유구한(?) 해외 출장 명물이었다. 쌀 꼭 먹어줘야 되는 사람들이 밥 없는 나라로 다닐 때 누룽지가 좋은 대안이 되어 주었으므로. 요즘은 포켓 누룽지, 미니 누룽지 같은 이름으로 소포장된 것이 많이 나와 있어서, 엄마가 유일하게 사 들고 온 농협 출신의 ‘우리누룽지’를 내려놓고, 역시나 마켓컬리에서 주문해 두었던 포켓 누룽지를 챙겼다. 심지어 김치볶음밥 맛 누룽지 같은 것도 있어 더욱 유용하다.
- 누룽지는 그냥 간식으로 오독오독 먹을 수도 있고, 끓인 물을 부어 먹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독채 숙소라면 냄비에 아예 풀풀 끓여 먹을 수 있는데, 누룽지 또한 부드럽게 풀어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가능하다면 이쪽 옵션을 더 추천한다. 여기에 캔 김치 하나 딱 까면, 꼬인 적도 없었던 속이 싹 풀리는 기분이 든다. 주로 입 까슬한 아침의 식사로 추천한다.
6. 맥심과 카누로 대동단결
- 커피의 나라 이탈리아에 가면서 맥심과 카누를 챙겨 가는 사람이 있다? 네, 그게 저희였습니다. 우리 엄마 또한 다년간의 동네 부녀회 및 지역사회 모임에서 회장 총무를 해온 경력으로, 원거리 여행 시 필요한 짐 챙기는 데에 이력이 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젊은 시절부터 아침마다 맥심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이런 습관을 커피의 나라, 에스프레소의 나라 간다고 떼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엄마의 가방에서는 상당히 큰 크기의 지퍼백이 나왔고, 그 안에 맥심과 카누, 국화차 티백까지 들어 있었다. 심지어 카페인을 마시면 피부가 뒤집어져 한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은 동생을 위해 디카페인 카누가 세심하게 들어 있었다. 카페인을 마실 수 있는 사람들 몫의 블랙커피로는, 피부가 뒤집힌 원인이 카페인인 걸 알기 직전에 동생이 맛있다며 주문해 놓았던 커피빈 것이 들어 있었다.
- 듀오링고로 배운 단어가 카푸치노밖에 없는 사람은 열심히 카푸치노를 주문했고, 가서 우리는 맛있는 커피를 꽤 많이 마셨지만, 그래도 맥심과 카누 심지어 국화차까지 동원해 가족의 무드 비슷한 것을 느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맥심 커피믹스를 사랑하시는 부모님과 가는 여행 길이라면, 꼭 챙겨 가보자. 에스프레소와 커피믹스 사이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으니까.
여행지에서 음식은 늘 닥쳐 봐야 아는 그 무엇이다. 남들 다 맛있다고 하는 음식이 내 입에는 안 맞을 수도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의 식당이어도 우리 부모님께는 “물이 제일 맛있”는 곳일 수도 있다. 그런 것도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추억이고 경험이라고 받아들이며 웃어 넘기는 여유 있는 태도를 가지려면, 내 캐리어에 컵라면과 누룽지 하나 정도는 들어 있는 게 좋다. 그래야 마음이 빡빡해지지 않는다. 곳간에서 여유 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번 여행에서 마음 깊이 ‘아, 나 지금 진짜 잘 쉬고 있고 너무 행복하다’고 느껴졌던 순간들을 돌아보면, 포지타노 바닷가 식당의 맛있는 생선 요리나 아말피 최고 맛집의 오징어 튀김에 기분이 사르르 좋아졌던 순간뿐 아니라, 도착 첫 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호텔 방에서 마트의 포장 초밥 나눠 먹은 시간도 있다. 아바(ABBA) 명곡을 틀어 놓고, 하얀 벽면에 튀어오르는 햇살을 보면서, 딱히 무엇 하지 않았는데 그냥 너무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되어 있다. 화려한 음식이 아니어도, 같이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니까. 현지 마트와 한식당, 캐리어의 짐 등 한식 조달처를 최대한 화려하게 다각화하여 즐거운 여행길을 만들자.
[오늘의 요약]
1. 한식당 위치를 미리 파악해 둔다.
로마 한식당 추천: 가인
2. 햇반 + 볶음 고추장 + 현지마트에서 샐러드용 야채 구입 = 비빔밥!
3. 현지 마트를 꼭 가보자 (포장용 스시나 샐러드 등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다)
4. 김치와 컵라면을 꼭 챙긴다
김치는 팩 말고 캔으로: 요런 데 한번 들어가서 쭉 보는 것도 좋아요
5. 간식으로도 좋고, 끓여서 아침으로도 좋은 누룽지
포켓누룽지로 챙기면 좋다
6. 커피믹스가 습관이라면 커피의 나라에 가도 커피믹스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