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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04. 2024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는 여행 기록하기

결국 남는 건 기록이다

기억은 낡는다. 환희나 고통이 너무 커서, 이 기억 절대 잊히지 않겠지 싶었던 기억조차 흐려지고 뿌옇게 번진다. 어릴 땐 거기에 일종의 불안이나 공포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 일기는, 마치 미래의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다시 읽을 것을 염두에 둔 것처럼 쓰이곤 했다. 아마 어린 시절 유일하게 읽은 남의 일기가 <안네의 일기>였던 탓도 있을 것이다. 어설픈 약도를 그리거나, 처음 만난 사람의 인상을 스케치하듯 묘사하는 문장들, 있었던 일과 거기서 느낀 감정까지 소상히 기록해 두곤 했다.


그런데 기억의 격차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만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기억이 전혀 다른 지점들이 있는 것이다. 미세한 디테일 차이 정도뿐 아니라, ‘A다 vs A가 아니다’ 수준으로 정반대 기억조차 존재했다. 한참 전의 기억을 확인한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기에, 이런 경우는 대부분 그냥 황당한 마음으로 진실이 뭐였을까 궁금해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깨닫는 수밖에 없다. 기억이란 것도 결국 각자가 편집한, 뇌 안의 기록일 뿐이라는 걸.



기뻤던 여행의 순간들은 대체로 비슷한 양상으로 기억에 남긴 하지만, 그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던 날들의 기억 또한 시간이 가면 잊힌다. 힘들었던 기억은 줄어들고 미화된다는 점은 좋지만, 소중하게 오래오래 돌아보고 싶은 순간들이 점차 흐릿해지는 건 아쉬운 일이다. 우리 모두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살지만, 사실 우리가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날로날로 줄어들고 있는 거니까.


그러므로 이 소중한 가족 여행에서, 숙소와 식당과 짐 챙기기에도 바쁘겠지만, 그래도 꼭 기록을 남기셨으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추천한다. 기록을 어떻게 남기면 좋을까?



1단계. 여행 기록을 남기기로 결정한다.

이게 어떻게 첫 단계일 수 있냐 싶겠지만… 사실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과 영상을 담는 건 굳이 결심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하니까.


하지만 우리 다 알고 있듯이, 핸드폰으로 담아둔 사진과 영상은 또 다른 사진과 영상에 묻혀 그저 클라우드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을 뿐, 생각보다 잘 들여다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여행 기록은 단순히 담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그 담은 것들을 부모님이 잘 꺼내 보실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할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


우리 집은 크게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모아 영상 하나로 편집하고 유튜브에 올려 가족들과 함께 보는 것. 두 번째는 포토 프린터를 준비하여, 현지에서 그 날 그 날 찍은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인쇄하고 버스 티켓 같은 것과 함께 붙여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좋은 생각이었지만 첫 번째만 성공했다.



2단계. 혈육 간에 역할을 나누어 사진/영상을 담는다.

한국인답게, 가는 곳마다 음식 사진을 찍는 것도 좋다. 다 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단체 사진을 남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여행의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시야에 비춰졌던 소소한 풍경들이다. 천천히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 눈앞의 음식에 집중한 모습, 그냥 숙소에 널부러져 있지만 환하게 웃고 있던 모습 등등.


철저하게 누구는 사진, 누구는 영상만 찍자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래도 암묵적으로 사진과 영상을 잘 찍기로 합의하는 대화는 필요한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 영상은 있는데 혈육의 영상이 남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집에 있었던 일이다.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아무래도 에이즈 환자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시간이 좀 길었다 보니 인물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때 얼굴이 잘 나오지 않게 찍는 것에 익숙하고 취향도 좀 정물 위주로… 하. 다 치졸한 변명이다. 그냥 내가 동생 영상을 충분히 찍지 못했다.)


혈육 간에 역할을 나누지 않아도 카메라 포커스는 자연히 부모님께 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여행 영상에 부모님만 있고 자식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섭섭한 마음은 결국 부모님 마음이다. 그러므로 서로 간략한 합의를 보아 둘 필요가 있다.



3단계. 포토 프린터는 좋은 옵션이다.

나는 지금도 핸드폰으로 휙휙 밀어서 사진을 보는 것보다 어린 시절 앨범을 펼쳐서 보는 게 더 좋다. 부모님과 같이 보기엔 더더욱 그렇다. 사진 한 장이더라도 물성이란 걸 무시할 수 없다. 손에 닿는 감각은 분명 중요하다.


이런 생각으로 여행에 가기 전에 포토 프린터를 미리 구입하고, 스크랩북 표지를 꾸민 다음, 그 모든 걸 이고지고 이탈리아까지 갔는데… 정작 포토 프린터는 단 하루도 꺼내지 않았다. 원래 자주 쓰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포토 프린터를 자주 쓰지 않던 우리로서는, 피곤한데 굳이 할 일을 늘리기가 좀 귀찮았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 사진에 좀 적극적인 편이시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진을 고르고 인화해 앨범으로 만드는 작업은 이후 한국에 와서 진행해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생각했다. 현장에서 피곤한데 굳이 부모님께 일을 하나 더 안겨드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버스 티켓과 박물관 입장권처럼 스크랩북에 같이 넣어 두고 싶은 것들은 잘 챙겨 왔다. (그리고 아직도 안 만들었다. 하지만 진짜 꼭 할 거예요.)


포토 프린터는 좋은 옵션이다. 좋은 방법이지만, 필수가 아니라 옵션이다. 그래도 전이 됐든 후가 됐든 사진은 꼭 인화해서 드리면 부모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다.


4단계. 영상을 편집한 후에는 반드시 가족 상영회를 연다

우리 집의 경우엔 동생이 영상 편집을 몇 차례 해본 적이 있어서 그냥 동생이 도맡아 영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영상을 만들어본 사람이 없더라도, 요즘 영상 편집 어플은 초보자에게도 상당히 친절하게 나오므로 도전해볼 만하다. 도저히 도전할 자신이 없다면 사진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 슬라이드쇼에 음악만 깔아도 좋다. 아무튼 내가 꼭 추천하고 싶은 건 가족 상영회이다.


서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그래서 서술해도 새로운 정보 값은 0인 문장들을 서로의 시점으로 다시 이야기하는 건, 그런 ‘그땐 그랬지’ 류의 대화는 정말 즐겁다. 우리 집의 경우엔 해외여행을 질색하는 (더 정확히는 비행기 탑승을 절대 원치 않는) 아빠가 집에 남고 엄마만 가셨던 여행이기 때문에, 아빠에게 여행 결과 보고(?) 겸 추억여행 겸 해서 상영회를 진행했다.



사진과 영상으로 최선을 다해 기록을 남겨도 기억은 어딘가에서 휘발되고 또 변질된다. 그러나 괜찮다. 우리의 목적은 100%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같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오래오래 기뻐하는 것이니까.


여행지에서 내 눈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들은, 바티칸 박물관의 위대한 예술 작품이나 하얀 파도가 시원하게 깨지는 청록빛 바다 외에도, 어디인지도 모르게 슥 스쳐 지나간 골목길, 소박한 기차 역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바라본,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모습, 카트를 끌고 다녔던 마트의 내부 모습처럼 일상적이고 별거 아닌 순간들도 있었다. 결국 그런 사소한 기쁨의 순간들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는다.


나는 지금도 생에 지칠 때 ‘그땐 참 좋았지’ 느낌으로 가끔씩 동생이 만든 영상을 재생해 보곤 한다. 그리고 나면 조금 더 힘이 난다. 내년쯤에는 편안하고 즐겁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밝고 다채로운 아시아 국가를 하나 골라 또 엄마랑 여행을 가야지. 그러려면 또 그때까지 열심히 살아가야지. 비유적인 표현으로 추억을 기록한 페이지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걸 물리적으로 감각하는 기분은 꽤나 좋다.


생각난 김에 한 번 더 보아야지. 어쩐지 엄마와 줄곧 함께 보낸 여러 날 여러 밤이 그리운, 그런 날이다.


https://youtu.be/2N3P3ToHmds?si=UvTPTwqNgpvJhP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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