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Oct 18. 2015

너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면

기대와 불안의 이중주 안에서 (2)


  기대와 불안이 나란히 마음을 메운 날은 또 있다. 그 날을 이야기하려면 그 전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결연 아동 중 한 아이가 몸이 좋지 않아 의료 쪽으로 어떤 도움이 더 필요한지 파악하러 간 날이었다.


  일전에도 결연을 끊네 마네 하면서 그 어머니가 한바탕 난리를 쳤던 집이었고, 아이는 기숙 학교에서 지내는데 한두 달에 한 번씩만 나올 수 있다고 해서 우리도 얼굴 보기 힘든 아이였다.


  그 날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마음의 나이가 조금 어리고 무릎이 안 좋아서 특수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정도였다. 특수 신발 제작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견적을 내 알려달라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으나 피드백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 마음이 조금 어리지만 장애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 두루뭉술한 말로는 대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씩 만날 때 보면 다른 애들이랑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가 그 때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그러다 정확히 어떤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지, 집에 찾아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 보기로 한 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 삼촌의 집이었다. 삼촌, 숙모, 사촌들, 그리고 엄마와 아이가 같이 사는 집. 아이 엄마의 말을 빌자면 아이는 삼촌과 숙모에게 예쁨 받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자기는 아이만 보고 산다고 입만 열면 버릇처럼 말하는 아이 엄마였기에, 이 집을 나와 아이와 둘이 따로 살면 어떻겠느냐 제안도 해 보았다.


  하지만 세상에 굉장히 겁을 먹고 있는 아이 엄마는 자기가 자주 아프고 삼촌밖에 자기를 돌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기는 이 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아이 하는 짓이 딱 제 아빠 하던 것과 똑같아 삼촌이 싫어하는 거라고도 했다. 자기도 그게 너무 싫다고 했다. 아이밖에 없다던 엄마 입에서 불과 오분 후에 나온 말이었다. 삼촌에 대해 또 아이에 대해 좋게 말했다가 나쁘게 말했다가, 계속해서 방향이 지그재그 엇갈리는 이야기는 복잡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노트에 작은 글씨로 필기를 했다. '아이가 집에 오는 일 거의 없음', '집에 있을 때는 혼잣말을 함', '신경정신과에 갔는데 2주 후 다시 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았음', '엄마가 문제 있어 보이고 가정 내 분위기 좋지 않음', '아이의 외로움이 깊을 것 같아 걱정됨'...


  그리고 그 날 밤 같이 일하는 친구와 앉아서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삼촌이 이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변수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기숙 학교에 보낸 걸까, 아니면 아이에게 무관심한 걸까.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신경 정신과라는 이름만 생각하며 왔다가 본, 당황스러웠던 정문.

  연휴가 시작되고 우리는 병원 예약을 했다. 클리닉에 있는 닥터가 추천해 준 병원이라고 했는데 가보니 이름이 정말이지 노골적이었다. National institute for mentally handicapped. 그래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 아이는 지체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심리 상담이 필요한 거라, 경우가 전혀 달랐으므로.


  접수 카운터 앞에 이르러서는 조금 더 당황했다. 줄줄 놓인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눈빛으로 다른 세계를 보고 있었다. 사실 우리 아이는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정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건데, 혹시나 그 의도가 잘못 전해져 오늘 병원을 잘못 온 건 아닐까 나는 내심 안절부절못했다.


  접수를 마치고 한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접수를 해 준 여자가 들어와서 키, 몸무게, 머리 둘레를 재 주었다. 자도 저울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으며, 무엇보다 여자의 손길이 티 나게 건성이었다.


  밀려오는 불안감을 꾹 참고 10번 방으로 가라는 안내를 따른다. 앞 사람이 끝나기를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의사인지 상담사인지 한 여선생님이 와서 우리를 9번 방으로 데리고 갔다.


  선생님은 아이를 앉혀 놓고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A부터 Z까지 써 보라든지, 1에서 20까지 써 보라든지, 짤막한 단어의 철자를 묻는다든지, 예닐곱 줄의 글을 읽힌 다음 그 내용을 묻는다든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든지.


  줄줄 잘 해내던 아이는 선생님께 결석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쓰라는 데서 막혔다. ‘학교를 못 가요. 왜냐하면’에서 멈춘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몇 마디 다그치자 선생님은 단호한 말투로 저지했다. 이집트 벽화 뚫고 나온 것 같이 생긴 얼굴인데 눈까지 크게 뜨니 좀 무섭다. 탁구 경기를 보는 듯한 심정으로 계속 지켜보았다.


  이후로도 질문은 계속되었다. 인도 현재 수상은 누군지, 얼마 전에 작고하신 분이자 교육계의 큰 별이었던 이전 대통령 이름은 무엇인지, 다음 달에 있는 큰 명절 이름은 무엇인지, 학교에서 집까지 대중 교통으로 혼자서 갈 수 있는지.


  이윽고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아이의 학교 환경은 어떤지, 가족 병력이 있진 않은지, 임신 기간에 건강 상의 문제는 없었는지, 꼼꼼한 질문은 1시간쯤 이어지다가 점심시간 때문에 멈췄다. 한 시간 후 12번 방으로 오라는 지시 사항과 아름다운 미소를 남기고 선생님은 나갔다. 우리는 각자의 착잡함을 안고 한 시간을 보냈다.


착잡하거나 말거나 풍광은 아름다웠으니... 이 담 너머 안쪽은 특수 아동 학교라고 한다. 기물 파손 우려로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나의 착잡함은 ‘장애아가 아닌데 병원에서 이런 검사와 상담을 받게 된 상황이 심히 유감스럽다’로 요약됐다. 가족력까지 들춰 묻는 질문 앞에서 아이가 스스로 죄스럽게 느끼거나 상처를 받지는 않을지. 천진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의 표정은 그다지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반면 아이 엄마는 아이에 대한 질문만 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가족 관계에 대한 질문까지 받아 좀 놀랐던 모양이다. 아이가 제 아버지를 쏙 빼서 저렇게 말을 안 듣는다고, 아이 삼촌도 숙모도 참 잘해준다고 늘 말해왔건만, 우리 현지인 간사를 붙들고 “사실은...” 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사실 아이가 좀 둔하고 느린 것도 나를 닮은 것 같고, 삼촌 집에서는 그릇과 컵, 비누까지도 다 따로 쓸 만큼 차별을 한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나한테 통역해 주지는 못했지만 현지인 간사는 사실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하던 이야기와는 백팔십도 다른 이야기였다. 즉 아이 엄마는 그때그때 요령껏 손바닥 뒤집듯 내용을 바꿔 가며 말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착잡한 채 오후 상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기숙 학교에 대한 질문을 몇 개 더 던지셨다. 언제부터 기숙 학교에서 지냈느냐고 물으니 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쭉 거기 있었다는 대답이 들려온다.


  삼촌 직업상 이사가 잦아 그랬다는 아이 엄마의 설명이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지는 건 혼자만의 과잉 반응이기를. 그러나 그 후로는 영어와 힌디를 섞어 이야기하시는 선생님 덕분에 중간중간 영어로 통역되는 말만 들으며 대화의 반밖에 못 알아들은 나까지 우리 모두 경악할 만한 대답들이 이어졌다.


- 룸메이트가 몇 명이니?
- 60명이요. (우리는 sixteen을 sixty로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six zero? 하고 되물었다.)
- 큰 홀 같은 곳을 쓰나 보구나. 침대는 이 층 침대니, 그냥 침대니? (상담사 선생님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역시 프로는 노련했다. 말을 서둘러 돌렸다.)
- 침대 없는데요. 바닥에서 자요.


  거기까지 듣고 나는 불편한 표정을 애써 감추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집에서라면 자는 곳이 이 층 침대든 그냥 침대든 바닥이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60명이 한 공간을 쓰는데 침대도 없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자기만의 공간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였다.


  음식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는 평소엔 괜찮지만 한 번씩 밥에서 벌레가 나오는데 그럴 땐 정말 거기 있기 싫다고 했다. 나는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밤에 불을 끈 후나 전기가 나가는 날이면,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이 놀라게 하는 일이 잦은 모양이었다.


  그런 날은 악몽을 꾸고 엉엉 울면서 깬다고 했다. 상담사 선생님이 무어라 힌디로 질문을 했고, 아이의 대답은 “이달 들어서는 그런 적이 없고, 지난달까지는 계속 그랬어요.”로 통역되었다. 또 무어라 질문을 했고, 다음 대답이 통역된 말은 "선생님께 말씀드려도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아요."였다. 나는 계속해서 입술만 깨물었다.


  상담사 선생님은 아이와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 엄마와 현지인 간사,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현지인 간사에게 말했다. 그 학교 사정이 그렇게 열악한 지 몰랐다고.


  현지인 간사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애써 위안을 찾고 싶었던지 아이 엄마에게 매트리스나 침대보 같은 건 좋은 걸 주냐고 물었다. 아이 엄마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행사장 같은 데서 주로 쓰는 빨간색 카펫을 깔고 잔다고 대답했다. 그건 말이 카펫이지 그냥 부직포에 가깝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뿐 아니라 그 카펫을 안다면 누구라도 경악할 것이다. 야외 행사장에서 맨땅이 드러나지 않도록 깔아주는 것이지만 흔히 상상하는 레드카펫이 아니다. 과장을 아주 조금만 보태어 실 반 먼지 반으로 이루어진 부직포는 세탁도 불가능하게 생겨먹었다. 노숙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환경이다.


  우리는 다 경악하고 있는데 음식에 대해서도 아이 엄마는 태연했다. 자기도 몇 번 가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자기가 먹을 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거다.


  물론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 곳이니, 배식하는 동안에도 날벌레가 빠질 수 있으므로 벌레 하나에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너무 태연한 아이 엄마의 태도를 보며 나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극성 맞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지만, 아이가 괴로워하는 걸 방치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곧 상담 선생님은 우리를 다시 부르고 이번에는 아이를 내보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소견을 들려 주었다.


“아이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능 지수에도 문제가 없고요. 다만 아이가 공부하는 면에서 좀 느린 건 사실인데, 정서적인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60명이 한 방을 쓰지만 아이에게 진정한 친구는 없는 듯합니다. 집에도 몇 번 가지 못하고, 엄마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물론 어머님 혼자 아이를 키우기 힘드시겠죠. 여러 사정이 있을 건 이해하지만, 의료진 입장에서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아무튼 아이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아이와 더 자주 연락하시고 더 많이 대화하신다면 아이가 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상담 선생님은 마침내 포인트를 짚었다. ‘혹시 아이 삼촌이나 숙모, 사촌들과의 사이에서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나와 현지인 간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본질이 건드려진,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아이 엄마는 대답했다. 집에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든지 규칙이 많고, 자기가 나갈 때도 다 허락을 받고 나갈 수가 있다고. 상담 선생님은 날카롭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이가 사촌들이랑 같이 놀 수는 있는지. 사촌들이 불러도 아이는 같이 놀지 않는다 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얼마든지 섞여서 노는 아이인데. 상담 선생님은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큰 눈을 빛내며 말하고는 서류에 무언가 적었다.


아이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쓰라는 대로 쓰고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곳의 진료실을 더 돌았다. ‘특수 교육’, ‘행동 교정’이라는 팻말이 붙은 진료실이었지만 팻말과 상관 없이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다 비슷했다. “아이에겐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아이에게 주어진 건강한 주변 환경과 역할 모델이 없다. 성취를 이루고  인정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중만이 건강한 관계를 이룰 수 있는데, 가족 간에도 학교에서도 아이가 그런 존중을 좀 받아야 한다.”가 골자였다.


  우리는 그 동안 관찰하며 내린 결론을 한 시간만에 끌어내는 선생님들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 엄마는 긴긴 설명을 다 듣고 “그래서 해결책이 뭔가요?”를 물었다. 처방전이 나왔는데 처방전을 또 달라는 꼴이었다. 한숨이 나왔지만 속으로 삼켰다.



  사실 아이의 가정 상황은 어떻게 얽힌 건지 모양새가 잘 잡히지 않는다. 삼촌과 어머니의 관계부터가 오리무중이다. 어머니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도 알 수가 없다. 가족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삼촌을 나쁜 사람이라고 몰아쳐 버릴 순 없다.


  모든 사정을 알 수도 없거니와 또 우리네 삶이라는 게 그렇게 흑백이 뚜렷하지 않으니까. 권선징악을 주제로 얄팍하게 다듬어 놓은 이야기가 아닌 다음에야,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으로 서로를 규정할 수 없는 게, 입장의 차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게 우리 삶이 아닌가.


  마치 뿌리를 다치지 않게 나무를 옮겨 심어야 하는 인부가 된 기분이다. 부드러운 흙을 하루 종일 열심히 파고 나니, 가느다란 잔뿌리들이 너무나 많아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고민스러운 인부. 본의 아니게 남의 집 가정사 속속들이 끼게 되는 이런 일이 왕왕 있다.


  눈을 감았다 뜬다.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밖에서 아이들과 기다리고 있던 현지인 간사 언니가 오후 상담 이야기를 다 듣더니 낮에 아이 엄마에게 들었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오래전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실 때 삼촌이 아버지를 때리는 걸 아이가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는 그 후로 삼촌이 집에 있으면 꼭 밖으로 나가거나 겉돌았다. 절대 같은 장소에 있지 않으려는 것처럼.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드러누운 어느 날, 그래서 어머니만 빼고 숙모의 친정에 다 같이 놀러간 어느 날, 숙모는 의아스러웠던 그 모습에 대해 물었다. 아이는 질문을 받으니 그냥 대답했다. 아버지를 때리는 걸 본 이후로 자기도 어쩐지 가만히 있어도 맞을 것 같이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숙모는 화가 났다. 자기 친정 식구가 다 있는 자리에서 망신을 줘도 유분수지 그런 말을 했다고.


  우리는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맞춰 보았다. 삼촌을 만나 보아야지만 완성될 수 있는 퍼즐이었다. 직업상 이동이 잦다는 삼촌을, 우리 현지인 간사들조차 만나본 적이 없었다. 집으로는 잘 못 오게 하면서 단편적인 정보만 자기 입맛에 맞게 건네주는 아이 엄마의 말만을, 미안하지만 100% 그것만 수용하고 넘기기에는 상황이 좀 복잡하다. 어떻든 아이는 보호받아야 하니까.


  그러나 사실 퍼즐이 완성되고 아니고는 우리 손에 있는 일이 아니다. 완성해서 좀 더 나은 상담을 해 줄 수는 있겠지만, 우린 상담 전문가도 아닌 데다가... 완성해서 파악한다 한들 뚜렷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나도 사람이니 잘 알고 있다. 의지와 노력을 다 퍼부어도 사람이 변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하물며 그 엄마와 삼촌이 아이를 위해 변하리라고 기대하긴 어려웠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상담을  계속해 나가겠지만 당장 아이를 위해 무언가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우리는 엄마와 아이가 같이 살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더 좋은 기숙 학교로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일을 추진해 보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뇌에 과부하가 걸린 기분이었다. 뻣뻣한 로봇처럼 잘 작동되지 않는 내 뇌가 지쳤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사실 하루 종일 이어진 상담과 거기서 들은 이야기들도 마음에 과중하게 와 닿았지만, 상담과 상담 사이에 복도에서 순서를 기다리거나 진료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도 편안하지는 않았다. 나는 때때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수 교육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앞에는 한 남자가 소년을 데리고 앉아서 열심히 두 자릿수 뺄셈을 가르치고 있었다. 딱히 물끄러미 본 것도 아닌데 남자는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뒤돌아보며 말을 했다. “아니 글쎄 이 녀석이 6학년인데 이걸 못 한다니까” 하면서.


  거기까지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하면 늘겠죠, 대답하는데 남자는 내가 그러든가 말든가 말을 이어간다. 이 녀석이 1,000까지 숫자를 쓸 줄도 아는데 이걸 못 한다고. 아이의 머리를 툭툭 쳐 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얼핏 보면 아이가 못 한다고 구박을 하는 것만 같은데, 말 곳곳에 은근슬쩍 자랑과 자부심도 섞여 있다. “그걸 다 해내다니 대단한데요.” 칭찬을 하며 본 소년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남자는 이내 아이가 그린 간디 그림도 보여준다. 물감으로 제법 말끔하게 색칠된 그림은 딱히 칭찬을 자아내야 할 필요도 없이 꽤 잘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칭찬을 하든지 말든지,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싸한 무표정이었는데 그냥 기분이 어떤가 보구나 하는 느낌보다는 마치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이의 눈이, 그 안이 닫혀 있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러는 동안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어떤 여자와 그 딸이 들어와서는 내 머리끈이 예쁘다고 어디서 샀냐고 묻는다. 아니 아마도 그렇게 물은 것 같다. 이쯤 되니 나는 정신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그 딸이 몇 학년이냐고 묻더니, “아니 글쎄 이 녀석이 6학년인데”를 또 시작한다. 이 모든 대화는 영어, 힌디, 현지어가 골고루 섞여 진행되었으므로 중간중간 나는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현지인 간사를 바라보았지만 현지인 간사는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딱히 통역을 해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었지만, 계속 해서 반복하는 말을 눈치로 대강 알아듣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소통하지 않는 세상,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는 세상이야말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아닐까. 내 말이라는 건 얼마든지 내 입장에 따라 입맛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니까. 쌍방향의 소통이란 사람을 살리는구나, 그 소통의 부재에 눌려 자라지 못한 우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겁다.


  인도 사람들도 평생 가 볼 일이 거의 없는 병원을 나는 대체 몇 군데를 가보는 건지.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그 안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풀려 있던 눈,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말가니 보던 눈빛들을.


  그 눈으로 보는 세계는 어떤 모습 일까.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켜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돌아선 그 날, 아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임을 안다. 앞으로도 다른 팀원들이 계속 하겠지만 나는 떠날 테니까. 열흘 앞으로 다가온 출국을 준비하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다. 언젠가 기회가 닿아 이 곳을 다시 방문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여 보지만 미래의 일은 모르는 일이다.


  오늘 그 병원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같이 있어도 서로의 세상은 다르다. 모두 다르지만 서로의 세계를 들을 수 있다면, 서로에게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더욱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세계에 살고 있다.


  계속해서 귀 기울이고 싶다. 여태까지 귀 기울여온 세계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다. 기대와 불안의 이중주 안에서 나도 발걸음을 떼어야 함을. 아이를 둘러싼 세계에 다리를 하나 놓아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어야 함을. 이아이의 보고서까지 해서 내 할 일을 마무리 잘 하고 다음 사람이 잘 이어갈 수 있게 정리해 놓고 가는 것이, 내 마지막임을.


  이제 끝의 끝으로 왔다. 마지막 이야기만이, 남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