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총에 아픈 사람들

HIV/AIDS 사업장 들어가기

by 선이정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그러나 에이즈가 뭐냐고 물으면 내 안에는 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옮을까 너무 두려운, 죽을병’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인도에 갈 때도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알지 못해서 더욱 막연한 공포가 커졌다.


인도에 있는 동안 종족 박해 피해 지역에서 왔다는 아이들과 스무 날 남짓 시간을 보냈고, 에이즈 사업장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3일뿐이었는데 그 며칠 들어가기도 쭈뼛거리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숙소를 옮긴 첫날 팀원들과 처음으로 이야기한 솔직한 감정 또한 ‘두려움’이었다.


이 도시에는 에이즈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돌보고 말 그대로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분들은 우리에게 에이즈가 어떤 것인지, 본인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다. 필기해 가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열심히 들었지만, 과학적 지식이 전무한 나는 그때에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에이즈가 어떤 건지는 갔다 와서 공부하면서 좀 더 알게 됐다. 과학을 못해 서슴없이 문과를 선택한 과거가 있는 사람이니만큼, 또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나 통계조차도 여기 저기서 내용과 의미를 다르게 보는 일이 무수한 만큼, 여기서 에이즈에 대해 하는 설명은 매우 비전문적임을 미리 밝힌다.


에이즈는 특정한 ‘질병’이 아니라 여러 증상을 기초로 한 ‘의학적 진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보균자라는 표현이 오히려 환자라는 표현보다 더 선을 긋는 느낌이 들어, 편의상 나는 더 적당한 표현을 찾을 때까지 환자라는 표현을 많이 쓸 것이다. 참고로 영어로는 Person Living With AIDS라고 하여 PLWA라고 쓰거나 HIV-infected people 같은 식으로, 환자를 뜻하는 'patient'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1차 놀랐다. 에이즈와 HIV는 엄밀히 다르다. HIV(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양성 반응을 보이고, 혈액 검사를 해보았을 때 면역 세포들의 수가 감소하는 증상이 진행되었을 때 에이즈라는 진단을 내린다. 한 마디로 에이즈는 사람의 면역력을 극도로 떨어뜨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에이즈로 죽었다’고 하면 면역 세포가 전멸해서 사망하는 경우보다 면역력이 떨어진 틈에 다른 병이 들어와 죽는 경우가 더 많다. 마치 전쟁 시 성벽이 벽돌 하나까지 다 무너져서 성을 뺏기는 게 아니라, 무너진 성벽으로 적군이 들어와서 성을 빼앗기는 경우가 대부이듯.


에이즈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숨만 쉬어도 감염될 것만 같은 공포감이 생기지만, 사실 에이즈가 전염되는 경로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큼직하게 나누어 보면 성접촉, 에이즈 환자의 피를 수혈받는 경우, 오염된 바늘이나 주사기를 곧바로 재사용하는 경우, 신생아가 산모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 정도로 정리된다.


즉 피와 피의 접촉 혹은 성과 성의 접촉이 아니라면 전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악수포옹 등의 일상적 접촉, 식사를 함께하는 것,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 같은 모기에 물리는 것 등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사실 내가 에이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가서 본 사람도 몇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느낀 것은 ‘이들을 죽이는 건 에이즈보다 눈총이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래전 한 소설에서 읽은 문장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알까? 눈총이라는 단어에 왜 총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지를.’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이다.)


에이즈라는 병은 전염병이고, 에이즈의 영향으로 죽은 사람들도 많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건 보통 거기까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옮을까 봐 두려운 죽을병’, 우리 중 대부분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에이즈를 인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응당 죽음 앞에 갖게 되는 공포 위에 실체 없는 공포가 더덕더덕 달라붙어 엄청난 무게의 공포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에이즈라는 병이 옮는 경로는 대개 부도덕한 행동을 연상시킨다. 사실 수혈을 잘못 받아 에이즈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흔히 에이즈에 걸렸다고 하면 그 사람이 성적으로 문란했거나 마약을 했거나…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게 된다. 그래서 더 에이즈에 대해 쉬쉬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어떻든 결국 에이즈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옮을까 봐 두려운 죽을병’이고 ‘걸린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인식까지 더 해져 에이즈 환자는 그야말로 주홍글씨 찍힌 사람이 된다. 내 부족한 시선으로 보기엔 이것이 에이즈라는 병의 현실이었다.


마치 사람에게 빨대를 꽂아 힘이란 힘은 다 쭉쭉 들이마시는 것만 같았다. 면역력,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당연히 체력, 이에 따라 경제력, 심지어는 사회적인 힘마저 모두 쭉쭉 들이킨 뒤에 그 사람을 패대기 쳐 죽이는 병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빨대 끝에는 에이즈라는 의학적 진단과 함께 사람들의 편견과 눈총도 있다.



팀과 함께 단기봉사로 인도를 방문했을 때 3곳의 에이즈 환자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에이즈 사업장에서 내가 접한 건 그게 다였다. 다시 가기까지, 그 외에 다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몰랐고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히려 백지 상태였기에 뚜렷한 이미지가 남았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한 과부가 혼자 살고 있다는 집이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그 집을 사진으로 찍어 흑백 처리만 하면 ‘전쟁통 피난민들이 임시 거처로 지은 움막집’ 뭐 이런 설명을 달고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만한 작은 움막집이었다. 보통의 흔한 집 마당에 공동 화장실과 함께 움막집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흔한 집’이 그곳의 갑(甲), 집주인 집이었다. 우리가 찾아간 과부는 그곳에서 월세 900루피(한화로 약 1만 7천 원)였나 하는 돈을 내며 살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집 안에는… 한 켠에 거적때기 같은 잠자리, 다른 한 켠에는 씻어서 얼기설기 쌓아 둔 부엌살림들이 옹색하게 늘어서 있었다. 생쥐처럼 자그만 몸을 감싼 붉은색 사리(인도 전통 의상)만큼이나 밝은 얼굴을 하고 우리를 맞아 준 과부는 덤덤하게 자기 인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더 이상의 부도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며 웃던 그 과부의 얼굴이 어두워진 건 한 순간, 7년 정도 이어진 결혼 생활을 ‘hell’이라고 표현할 때뿐이었다.


남편은 과부의 몸에 에이즈라는 흔적을 남긴 채 먼저 죽었고 과부는 그렇게 혼자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한 무더기 외국인이 과부를 찾아온 것이 신기했는지 이웃들이 연신 우리를 흘낏거렸고, 덩치가 작은 과부보다도 머리 하나쯤 작을 만큼 정말 키가 작은 집 주인 여자도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었지만 우리가 갈 때쯤 자꾸 과부를 떠밀며 뭐라 뭐라 이야기를 했다. 무슨 말이냐고 현지인 간사에게 물어보니 ‘이 여자를 데리고 가라’는 말이었. 때리다시피 떠다미는 우악스러운 손길 아래서과부는 그저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흔한 집' 같았지만 실은 이 구역 갑이었던 집 주인 집.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한 무더기의 외국인이 보이니 몰려든 동네 사람들일 뿐, 에이즈와는 별 상관이 없다.


다음 날 찾아간 두 곳 중 한 곳은 화장실도 없는 집에 과부와 딸, 아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딸만 HIV 음성이고 나머지 가족은 모두 양성이었다. 현지인 간사들은 정기적으로 감염자들의 집을 방문하기 때문에 이들과 친한 사이인데, 아주머니는 사리 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현지인 간사에게 무어라 계속 서럽게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힘이 없어 격일로 가사 도우미 일을 나가는데, 그 날은 버스 정류장에 있다가 너무 힘이 없어 쓰러졌다는 거였다. 의식을 잃은 건 아니고 힘이 없어 누웠다는 것 같았다. 왜 우리에게 전화하지 않았냐는 간사의 말에 아주머니는 번번이 신세 지는 것도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는 말을 내비쳤다.


그리고 제 엄마의 눈물 젖은 사리 끝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많아야 열예닐곱도 안 됐을 여자아이. 아픈 엄마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들어야 하는 그 나이대 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지.


팀원 중 하나가 통역을 통해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질문을 했을 때, 아이는 자기가 쓰는 말로 들은 그 말이 외계어나 되는 양 알아듣지 못했다. 현지인 리더와 아이가 심각하게 몇 마디 주고받다 힘겹게 나온 대답은 현실과 밸런스가 너무 맞지 않아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다는이었다. 그 나이 때 꿈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나는, 유치원 때부터 장래희망 그리기를 하고 자란 우리는 놀라면서도 씁쓸해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때마침 아이 돌잔치가 있다는 곳이었다. 이웃 사람들과 함께 예쁘고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일가족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여태까지 방문한 집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단칸방에서, 누구는 침대에 누구는 의자에 더러 누구는 바닥에 급히 깐 돗자리에 적당히 둘러앉았다.


케이크와 풍선이 전부인 돌잔치에서 아이를 축하해 주고 선물까지 내밀고 돌아왔다. 불과 두 달 전에 갔던 조카의 화려한 돌 잔치가 오버랩되어 기분이 미묘하기도 했고, 동시에 에이즈가 꺼뜨릴 수 없게 희로애락이 이어져 가는 삶의 촘촘한 단면을 본 것이 감사하기도 했다.


돌잔치에 와 주어 고맙다고 계속 말씀하시던 아주머니의 대접. 조촐해 보이지만 사실 무엇보다 융숭한 대접이었다.


팀으로 갔을 때 방문한 에이즈 가정은 이 세 곳이 전부다. 비슷하지만 모두 다른, 가슴 아프지만 또 일상적인 삶이 도시 곳곳에서 세밀하게 이어지고 있고 현지인 간사들은 그들의 삶을 함께하고 있다. 단순히 의학적인 조언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다사다난한 일마다 함께하며 더불어 살고 있었다.


우리가 세 가정밖에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지인 간사들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밤 12시가 넘도록 노트북 붙잡고 사진까지 보아가며 들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의 필기로만 남아있지만, 부분 부분 마음에 박혀 들었던 이야기들도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아파 눈물 나는 이야기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부부를 찾아왔다는 이야기이다. 남자 가족(아마 형제나 삼촌이나 뭐 그런 가족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흔한 가족.)이 이들을 돈 벌 수단으로만 여긴 나머지, 억지로 끌어내어 성매매를 시켰고 이들은 과정에서 HIV에 감염되었다.


이들은 울면서 ‘우리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행동에 치가 떨리고, 본 적도 없는 이들이 오래 괴로워하며 흘림 눈물이 생생하게마음에 쏟아졌다.


또 하나의 기억은 어떤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이다. 아이는 에이즈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현지인 간사들은 연말연시면 알고 지내는 에이즈 가정들을 모두 집에 초대해 잔치를 하는데, 그 날 간사 중 하나에게 자기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실 현지인 간사들이 에이즈 환자들을 집에 모두 초청한 그 날, 팀이 가서 같이 밥도 먹고 노래도 하고 이야기도 했다. 해서 나도 그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날 들은 여러 개의 아이들 이름 중 유일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름이 있는데 그게 이 아이였다.


한국 제품이 아니라 인도 제품인 히말라야 립밤을 너무나 신기해 했던 아이, 자기도 그게 입에 바르는 거라는 걸 방금 알아놓고 옆에 있는 아이에겐 마치 원래 알고 있던 것인 양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해 주던 귀여운 아이, 공연을 보는 내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있던 아이, 마지막에 할머니와 함께 터벅터벅 먼지 날리는 누런 흙길을 걸어가면서도 뒤 돌아 손을 흔들어 보였던 아이, 많이 외로워 보였던 아이. 간사 부부의 아이들보다 많아야 두세 살 많은 나이의 아이가, 그 가정을 보며 얼마나 가족이 그립고 외로웠을까 생각하니 참 속상했다.


내가 그 해 1월에 만난 사람들은 이 분들이 전부다. 그밖에 슈퍼마켓에서 일하면서 가난해도 밝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부부가 딸을 시집 보내려면 지참금을 위해 집을 팔아야 한다며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 에이즈의 영향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아내와 언어에 이상이 생긴 남편이 서로 붙들고 살고 있는 이야기, 에이즈 환자들의 가족조차 “어차피 죽을 사람들을 왜 돌보느냐”며 차갑게 환자를 내버려 둘 때 현지인 간사의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가 환자 옆에 앉자 사람들이 놀랐던 이야기 등등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곧 만나게 되겠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결혼식, 돌 잔치, 장례식 등등 다양한 삶의 순간에 그림자처럼 함께 서 있을 것이었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그냥 삶의 조각들일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 NGO가 내미는 손을 그들이 잡을 수 있도록 작은 연결고리가 되는 것, 그뿐이다. 작은 일이지만 내겐 참 기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삶을 나누는 친구로 다가가고 싶다고 일기에 썼다. 앞으로 2년의 시간,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고 싶다고. 병으로 아프고 시선에 또 아픈,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그러나 밝게 웃는 평범한 사람들. 만나러 가기까지 나도 조금은 아파야 했던 시간 모두 지나고 이제, 정말 만나러 갈 날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그래서 무겁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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